[한평우 칼럼] 르네상스(3)-산드로 보티첼리
그가 마음 깊이 연모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미녀였다. 그녀는 제노아의 귀족 태생으로, 피렌체의 명문가 베스푸치 가의 마르코와 결혼하기 위해 피렌체로 왔다. 당시 베스푸치 가문은 당대 피렌체 최고의 가문이요, 통치자였던 메디치 가문과 거리낌이 없이 교제하는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혈통이나 가문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이태리에서는 이런 관습이 로마가 태동한 이래 지속돼 온 전통이요 문화였다. 그런데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가문이 신통치 않았던 피혁공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피렌체는 가죽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그는 금 세공사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18세부터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베끼오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베스푸치 가문의 추천으로 메디치가 공방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던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리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피렌체의 실력자 줄리아노 메디치를 만나 연인 관계가 된 여인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향기를 한껏 풍기던 젊은 나이에, 그녀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연인 줄리아노 메디치도 파치노가의 음모로 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중에 줄리아노 메디치의 별장을 장식하도록 보티첼리에게 그림을 의뢰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 그리고 ‘봄(프리마베라)’이다.
한동안 그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다가, 후에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되었고 르네상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데 보티첼리는 비너스를 자신이 연모하는 시모네타(Simonetta)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비너스의 탄생은 그가 말년에 그렸기에 자신이 남모르게 연모하던 시모네타는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0년이 되었지만, 보티첼리의 마음 한자리에 영원한 연인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살아있었을 때는 언감생심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녀를 모델로 삼는 일에 만족해야 했지만, 연모하는 마음이야말로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영원한 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는 미소,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 무엇하나 버릴 게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여성들에는 하나같이 그녀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동시대 시인이자 피렌체대학 교수였던 안젤로 포지아노(Angelo Poziano)는 그녀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녀는 훌륭한 장점이 많지만, 특히 매너가 아주 뛰어났다. 무척이나 상냥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를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그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상대방을 향한 배려심이 흘러넘쳤던 그 여인이 화가 보티첼리의 모델이 되어 그가 주문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며 한동안 어떤 동작을 멈추고 있을 때, 화가는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연모하는 마음이 용암처럼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이유는 그녀는 유력한 가문의 마르코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사망하고 장례식을 치를 때, 그녀의 신체를 천으로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기 때문이다. 숨이 멎어 있을 때, 그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어찌하여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잊을 수 없는 것일까?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보티첼리는 평생을 홀로 지냈다. 당시의 유행인 듯 미켈란젤로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랬고… 아마도 31세 때 만난 시모네타를 한 시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시모네타의 모습을 천사처럼 그림 중앙에 배치하였다. 자신의 마음 중심에 담고 있었듯이.
그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모든 진액을 그 그림에 쏟아부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고독하고 가난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를 시모네타 무덤 곁에 묻어 달라”고. 그래서 그의 무덤은 시모네타가 있는 베스푸치 가문의 오그니 산티 교회당에 있다.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러기에 가슴 아프고 울림이 크게 전달되어 온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