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교회가 가져야 할 장애 인식 (3) 성경 속 장애
샬롬, 장애와 관련된 인식 개선에 대한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 땅 모든 존재는 누군가의 모태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생명을 품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언제나 ‘엄마, mother’가 1위로 꼽힌다니, 존엄한 생명에 대한 응답을 우리 모두 하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 이슈는 저출산이지요. 한국은 아이를 낳지 않아 큰 일이라고 합니다. 의례 당연히 생각했던 어머니라는 무게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사회가 공감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이를 둘만 낳아도 애국자라고 할 만큼, 가정 문제가 국가와 연결돼 있습니다.
어버이주일 설교에서 서두에 이렇게 여쭤봤습니다. “이곳에 계신 어머님들, 아이를 낳으셨으니 죄인이세요?” 다들 잠시 무슨 소리인가 싶어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아이를 낳는 모습 자체만 보면 죄된 모습으로 생각하게 하는 말씀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죄된 모습을 갖고 살아가니, 이는 잘못된 것이고 꼭 치료해서 바로잡아야 하는 일일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목회자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머니들께 치료받으라고 권고하십니까? 낙태는 죄라고 말하면서, 잉태가 죄라고 말하는 목회자는 없을 겁니다. 어머니들께 ‘원형의 모습이 아니니 장애인’이라 판정하실 리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2부에서 소상히 다뤘으니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보이는 모습들만으로 죄라고 함부로 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설교 중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 동안 일 많이 하셨지요? 죄를 열심히 지으셨겠네요.” 원형의 모습으로 보자면 말이죠. 일 하는 게 죄인의 모습이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갑자기 혼동스럽게 여겨지지만, 사실 히브리어 원문에 없는 말들을 현재 언어로 번역하면서 생겨난 선입견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는 마치 너그럽기만 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카리스’라는 은혜는 주권이라는 뜻과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카리스마’의 어원이 그것입니다. 즉 은혜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마치 우리가 주고 받는것처럼 쓰지요.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하나님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2. 대표적으로 이런 번역어 자체만을 우상화하다 그릇된 해석에 빠져 만들어진 종교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의증인’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칭호 또한 번역하면서 만들어졌는데, ‘여호와’라는 단어에 몰입한 그들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이고 유교적 삶을 살던 우리에게 죄는 ‘범죄행위’, 즉 강간, 살인, 도둑질, 음행 등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는 죄인이에요” 고백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취급하며, 선민사상으로 가득찬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은 죄인이고, 기독교인은 선인이라는 사상에 갇혀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 원문에서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시편 51편 5절의 ‘죄악’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본’은 꼬였다는 뜻입니다. 죄라고 번역된 ‘케트’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하마르티아’ 역시 방향에 대한 뜻입니다. 또 ‘빚’과 관련된 용어가 원어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쓰는 “너는 죄인이야”라는 말이 가진 징벌적이고 정죄적인 뜻과 달리, 본 의미를 살려서 전달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인생을 설명하기 힘들어”, “하나님을 알게 되니 꼬인게 풀리더라”, “나는 하나님께 빚졌어. 그건 세상에 빚진 것과 같아. 나는 빚 갚으면서 살려고”.
3.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나온 장애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례 중심으로 나누려 합니다. 아마 아주 잘 아시는 사건들일 겁니다.
1) 장애인은 선교의 대상인가 선교의 동역자인가: 사도행전 3장 ‘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기도시간, 많은 사람들이 성전 미문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그때 선천적 지체장애인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6절)”.
우리가 들어왔던 대중들을 향한 설교에서는 늘 “걷게 됐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 그러나 헬라어는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하고 서술합니다. 즉 성령 충만 이후 벌어진 사도행전 3장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사렛’이 붙어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나사렛은 무슨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1장 46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질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거야?”라고 따지며 빈정거립니다.
나사렛이라는 단어는 지역적 차별은 물론이요, 그 공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를 차별하는 시선이 만연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차별받는 곳에서도 예수님이 함께하시고 구원하심을 역설합니다.
사도행전 3장, 미문이라는 공간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성전 미문’을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얘는 여기 있는 게 당연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버려진 듯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문 안에는 들어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문 밖 이 사람만 그렇습니까? 미문 안 대다수 사람들도 그가 미문 밖에 있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들어오자 깜짝 놀라고 또 놀랐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미문 밖, 선천적 지체장애인은 차별당하는 상황을 인식조차 못하며 당연하게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문 안, 하나님을 믿는 대다수 사람들은 본인들이 심각한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식하는 것과 인식 못하는 것, 무엇이 더 폭력적일까요? 당연히 인식하지 못하는 차별이 더욱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은 그에게 치료 행위를 먼저 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거론합니다.
석사 논문을 쓰면서 지체장애인 보호자와 관련된 연구를 하려 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의 행복은 주변인과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당사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변 구성원들을 두텁고 포근하게 사회가 신경써줄 때, 장애인 당사자는 몸이 조금 불편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체장애인의 차별 경험과 보호자의 건강 사이 연관성을 밝혀내고자, 장애인 기관을 찾아 다녔습니다. 장애인 자립재활센터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을 찾아갔지만, 지체장애인의 보호자를 만나기는커녕 지체장애인을 만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봤는데, 대답이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장애인 인구 250만 명 가운데 약 절반이 지체장애인인데, 지체장애인을 장애인 시설에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요? 그런데 “지체장애인은 자기 표현이 가능해서 여기 안 오거나 찾기 힘들다”는 겁니다. 다들 ‘자립한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연구를 보면 휠체어 사용자들이 외부에 나가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차별 경험이 늘어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립이지 자립이 아닌데도 말이지요.
그렇다고 지체장애인들을 공공장소에서 얼마나 만날 수 있는지 되새겨 보세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살펴보면, 왜 장애인 시설에 휠체어 사용자가 많이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설 내에서 휠체어 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복지관이나 헬스장을 가 보면,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휠체어에서 옮겨 타야 가능합니다.
제가 제빵과 커피를 배우고 싶어 많은 학원과 장애인 시설들에 문의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대답이었습니다. 휠체어 장애인들이 배울 수 있는 시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장애인은 언제나 미문 밖 대상일 뿐입니다.
이는 차후 살펴볼 ‘수혜적 관계’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게 합니다. 자연스럽게 차별 상황이 만들어지고, 고립을 자립이라 여겨지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사도행전 3장의 장애인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치료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럼 이 본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7-8절)”. 자세히 보십시오. 치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힘을 얻었다(스테레오오, στερεόω)는 강하게 하다는 뜻이지, 의료적 용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16장 5절 ‘믿음이 굳건해졌다’는 말씀과 동일한 용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를 치료해준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본문은 여기서 끝나야 합니다. 성경은 철저히 목적에 의해 쓰인 책이니까요. 그래서 요한 기자는 써야 할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다 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성경은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과 함께 미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미문 밖이 아니라 안으로 말이지요. 걷고 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미문 안 사람들이 모두 봅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존재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존재들의 차이가 와 닿으십니까? 그것은 미문 밖과 안의 경계만큼 확연히 벌어진 것입니다.
치료의 대상을 굳이 정한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치료하기 원하셨던 것일까요? 성경 전체적으로 늘 바리새인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셨던 하나님은, 동일하게 사도행전 3장에서도 미문 안 사람들을 향하셨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안에 있던 대다수 사람들, 소위 예배드리고 기도하겠다고 오면서 성전 미문 밖 존재에 대해 “넌 여기 있는 게 당연해”라며 동전 몇 닢을 던져주고 선행을 했다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 철저히 시혜자적 위치에서 살다 미문 밖 존재와 함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채 그저 보기만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전 세계 어디서 온 사람이건 이해가 되는 언어로 바뀐 오순절 사건 후에도 여전히 사도행전 3장 교회 안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비춰줍니다.
2) 여전히 닫힌 문, 존중 없는 교회, 누구의 책임일까: 마가복음 7장 31-34절 ‘언어 장애인’을 중심으로
언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매우 징벌적이고 차별적입니다. 마가복음 7장 본문 번역어를 보십시오. 여전히 이 말씀 속에는 귀 먹고 말 더듬는다는 번역어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법은 청각장애인으로 언어장애를 동반한 중복장애로 표기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 교회는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따라가기도 급급합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존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데리고 무리에서 벗어나게 하신 뒤 치료하셨습니다.
또 36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건 겸손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절대 하지 마!”
예수님은 이 치료행위가 전파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치료 행위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치료하실 때도 특별히 말씀으로 치료하지 않으시고, 당시 민간요법 그대로 치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장애인에 대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때는 없으신지요. 장애인이라고 불러내 치료기도를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는 우월감에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으로는 성전 미문 밖과 안이 여전히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고립이지 자립이 아닙니다.
본문 속, 우리가 잘 쓰는 에바다(ἐφφαθά)라고 나온 단어는 아람어가 어원으로 ‘열리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문이 굳게 닫혀 고립된 그를 향해, 예수님은 “열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존재와 존재 사이 닫힌 문을 활짝 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도행전 3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베데스다 호숫가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자비의 호수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모두 치료되는 게 아니라 한 명만 치료되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빠른 사람 한 명만 치료되는 곳에서 주저앉아 남을 핑계대고 살아가는 한 선천성 지체장애인을 향해,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장애인을 공개 장소로 불러내 ‘장애인의 날’ 간증시키는 경우들을 보다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치료되고 좋아진 상황을 간증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치료받아서 좋아진다면 당연히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당수 치료가 목적이지 않은 장애인 당사자나 주변인들,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고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오히려 믿음이 약한 자요 죄인처럼 느껴질 수 있는, ‘베데스다의 논리’가 작동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치료자 하나님을 이야기하려거든 보다 은밀하게, 그리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3) 당사자주의: 마가복음 10:46-52절 ‘시각장애인’ 사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싼 가운데, 바디매오는 길 가장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중앙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사람들은 “잠잠하라”며 그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압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찌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1-52절)”.
예수님은 먼저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이 ‘당사자주의’입니다. 어떤 학자도, 어떤 목회자도 장애인 당사자만큼 장애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만큼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생략되고 무시되는 경우도 드뭅니다. 장애 유형은 15가지입니다. 유형마다 서로 언어가 다릅니다. 다 자기 상황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체장애만도 유형이 세분화됐습니다. 그러니 같은 지체장애 유형이어도 어디가 불편한지에 따라 욕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게 묻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제 휠체어 뒤를 잡는 분들이 무섭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는지 묻지 않고, “내가 휠체어를 밀어봤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탁구를 칠 때 일입니다. 대다수 지체장애인들은 한쪽 팔이나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허리가 휘어 한쪽 휠체어를 잡고 쳐야 합니다. 그러니 공이 날아오는 궤적을 맞추기 힘들고, 자세를 잡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 눈에는, 제가 일부러 자세를 못 잡는 것처럼 보이나 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언어가 다릅니다.
장애 유형끼리도 그러한데, 비장애인이 장애 문제를 푸는 방식에 있어 당사자의 목소리를 대신 학자들의 목소리를 우선하고 환경이 전혀 다른 해외 사례만을 가져오면,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책과 논문에 갇힌 이야기로 끝나거나 장밋빛 유토피아 이야기만 반복될 뿐, 집 앞으로 수동휠체어를 끌고 가서 마트에 다녀오는 평범함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사자주의란 무엇일까요? 누구든 우월적 위치에 서 있던 자신을 회개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치료가 욕구일 때는 당연히 우선되어야 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하는 것을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 속 장애인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 욕구도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치료 자체’를 필요없다고 여기는 이야기 또한 당사자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료되고 나서의 예수님의 언어입니다. “내가 고쳤다”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어떤 자기과시도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 즉 당사자 위주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반면 사람들은 왜 당사자들의 이야기로 풀어가지 않을까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선천적 시각장애인 사례를 통해 죄가 가진 특성을 이해하면 쉽게 알게 됩니다.
4)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의 위치로: 요한복음 9장 속 선천적 시각장애인 사례를 중심으로
나면서 못 보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여전히 죄를 따지고 있지요. 반면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치료 과정이 나오는데,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시각장애인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 보냄받은 존재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반면 주변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을 존중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8-19절)”.
사람들은 부모를 끌고 와 따져 묻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불편한 장애인이 죄를 보여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대다수 본문 속 주변인들의 모습 중 정죄하려는 습성 자체가 죄의 증거입니다.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원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창세기에서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①보기도 좋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②하나님처럼: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
③선악을 알게: 판단자의 위치
④먹기도 좋고: 욕심
이 네 가지 습성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타자의 눈에 보이는 행동을 가지고 죄인 취급을 한다든지, 내가 선민인 듯 우월감을 갖는다든지, 타자의 모습을 판단한다든지, 존재가 아닌 소유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용해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장애인이 선교 대상이 아니라 함께 선교하는 동역자여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4. 이제 정리를 해볼까요?
현실에서 장애인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우월감에 차 있습니다. 차별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장애인도 차별당한다는 인식 없이, 여전히 성전 미문 밖에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장애인이 264만여 명이니, 6가구 당 1가구에 장애인이 있는 셈입니다. 장애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는 노령화되면서 장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구약 89회, 신약 71회에 나오고, 범위를 넓히면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경우는 모두 유대인적 시각, 즉 우월적 시각입니다.
김기홍이 연구한 ‘장애인에 대한 태도의 기독교 세계관적 차별성 탐구’ 논문에서 목회자 63%가 장애인에 대한 사역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중 80%가 불쌍해서라고 답했어요.
우월적 시선이지요. 그 우월적 시선 자체가 죄의 본성이지, 겉으로 드러난 장애와 같은 것들이 죄의 특징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 하나님은 출애굽기 4장 11절에서 “누가 장애인을 만들었느냐? 하나님 내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고 이 땅에 부름받은 선교사입니다. 시혜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아닌, 동등함을 누리는 교회와 선교. 목회가 되어야 해요.
하나님은 지체장애인인 야곱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는 언어사용 능력이 어려웠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셨고, 바울 역시 신체적 질병이 있었음에도 사역에 함께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장애인을 불쌍히 보며 그것을 향한 선교사업에 열중을 올릴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가진 차별적 시선과 편견을 뿌리채 뽑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공적 예배인데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문 사이에 막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미문을 철폐해야 합니다. 성공한 장애인만 불러 간증하게 하는 막힌 담을 향해 “열리라!”고 외쳐야 합니다.
교회에서 장애인뿐 아니라 그 어떠한 존재도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면 더욱 안 됩니다. 당자자의 욕구 없이, 아니 욕구가 있더라도 우월감이 드러나며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이와 같은 논리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요?
5. 실천적 개혁: 어떻게 경계를 허무는 교회가 될 것인가?
1) 언어
먼저 우월적 언어와 차별적 언어를 교정해야 합니다.
장애인 혹은 장애인 사역을 호칭하는 언어들을 적어도 장애인 복지법에 맞게 표준화된 것으로 통일하고, 더 나은 대안 언어들을 오히려 교회가 제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채은하가 연구한 장애인 호칭의 부적절한 사례와 대안에 대하여 요약된 자료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채은하, 2020, p56-67).
2) 교육
장애인을 교육 대상으로 보는 것은 우월적 시선입니다. 사실 많은 장애인 단체를 가도 대부분은 장애인은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집니다. 함께 교육하는 권리를 가진 단체를 만나보기는 아직 힘듭니다.
교회가 이것을 선도하면 됩니다. 먼저 교육받아야 할 사람들은 비장애인과 리더십들입니다.
“왜 우리 교회 목회자 중에는 장애인이 없지?” “왜 우리 교계는 장애인을 청빙하지 않지?” “왜 우리는 따로 따로 예배드리지?” 등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장애인복지법 25조를 근거로 사회적 장애인식 개선 교육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다양한 장애유형을 이해하고, 모든 사람이 장애유무와 상관없이 평등하고 다름과 닮음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3) 평등한 노동
구약 시대 하나님은 지체장애인 야곱과 모세를, 그리고 신약 시대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줄 때 얼마만큼 수평적인가요? 세례문답을 할때 교육자료집 유형별로 맞춰 생각하나요?
발달장애인에게는 옆에서 선생님이나 보호자가 대답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언어 표현이 가능한 장애인은 언어로, 신체표현이 가능한 장애인에게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스템이 있는지, 그래서 아름다운 노동 동참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4) 공간 개혁
공간 개혁은 교회마다 형편이 다를 것입니다. 제도 차이로 인한 개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 차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기본적 물질과 환경의 차이를 알아야 그에 맞는 공간이나 제도적 개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간 개혁에서 전제조건이 있다면, ‘모든 장애인들이 보편적으로 오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개별적 구성이 아닌, 보편적 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가. 본당
-본당은 모두의 예배실로 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휠체어 자리가 있는데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위에서 나눈 이야기를 생각 해보세요. ‘분리 인가, 함께인가’?
장애인 자리를 맨 뒷자리에 휠체어만 세우게 한다든지, 제일 앞자리로 이끌고 가면 ‘분리’가 될 뿐입니다.
-예배 좌석
교회는 장애인이 앉을 좌석의 선택 폭을 넓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쉬운 방법은 ‘모두의 좌석’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장의자 위주 교회라면, 중간마다 짧은 장의자 혹은 개별 의자로 세팅하는 것입니다. 중간중간 휠체어 장애인들이 앉을 수 있도록 비교적 짧은 장의자를 배치하면 어떨까요?
-경사로 만들기
본당 강대상에 장애인이 올라가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본당은 장애인이 올라가기 가장 힘든 곳 중 한 곳입니다.
눈에 띄는 가운데보다 가장자리 부분에 경사로를 설치해, 편리하게 다닐수 있도록 구성해야 합니다.
-청각장애를 위한 수어통역 및 자막 지원
모두 수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인도자나 목회자 입모양이 보이는 화면을 띄워줍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안내판 및 바닥 안내판
예배 중 영상이 있을 때는 동영상 내용을 텍스트로 제공합시다. 환경상 제약이 있을 경우 옆에서 개인별로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 주차장
주차장은 장애인들이 교회에 오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입니다.
-장애인 주차장 확보
-도움 알림벨 주차장 입구에 설치하기
주차장에 장애인 자리는 꼭 확보해주시고, 아무리 주차장이 협소해도 장애인 주차장 통로를 확보해 주세요.
그중에서도 장애인 주차는 보행이 어려운 장애인이 탑승할 때만 가능합니다. 보행이 가능한데 무조건 장애인 주차장에 세워서는 안 됩니다.
보행상 장애 표준 기준표를 부착해 두시면 됩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안내를 같이 써주시면,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헷갈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 화장실
장애인 화장실도 규격이 있습니다.
가로 세로 1800×1600mm이며, 출입구는 900mm 이상 확보돼야 합니다.
장애인 화장실에는 가방이나 소지품을 올려둘 곳이 필요합니다. 또 옷을 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보다 도움이 됩니다. 장애인 화장실에는 꼭 휴지통이 필요합니다. 소변을 보게되는 카테타줄을 버릴 곳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면대도 같은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위생적이고 수치감을 주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장애인 화장실만 따로 구별하기보다 모두의 화장실, 가족 화장실 등으로 함께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라. 기숙형 방의 구성
신학교는 기숙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시나요? 보호자가 동반되지 않거나 기숙하기 어려운 환경이 강제되는 조건이기에, 아무리 마음이 절실해도 기숙형 신학교는 가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습니다.
장애인들은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거나 샤워실이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 신학교에서 기숙이 필수인 조건들은 학업 기회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먼저 신학교에서 공간 문제가 확보되든지, 안 된다면 기숙에 대한 예외적 조항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련회를 갈때도 마찬가지로 구별된 방을 배정해 주든지, 함께 있는 공간 중 독립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6. 사랑하는 여러분, 공간 및 제도 개혁은 이제 각 교회에서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성경 속 장애인 이야기는 더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눈 이야기들 안에 다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해야 할 일은 우리 공간에서, 우리가 했던 차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선교와 구제 사역을 했더라도, 본인이 있는 공간에서 얼마나 장애인 친구와 같이 밥을 먹고, 밖에 나가 비장애인 친구들과 노는 것처럼 같이 놀아보셨는지요. 늘 예배당 공간 안에서만 밥 먹고 인사만 주고받는 건 아닌지요.
이제 문을 활짝 열고 나가 함께 맛집에 가서 밥도 먹고, 같이 생활체육도 즐기고, 한강도 가고, 같이 예배에서 옆자리에 앉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생활 개선 없이, 교회의 인식 개선은 없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여러분의 미문, 굳게 닫힌 문이 ‘에바다’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실은, 장애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