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협심과 정의감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마가복음 4:21-2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인 것은 ‘메시아 비밀 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곧 등불이신 예수님은 당분간 자신의 신분을 감추셨지만, 결국 언젠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복음 전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질 것임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등불은 ‘비유 또는 복음의 비밀’을 뜻합니다. 앞서 12절에서는 비유를 ‘감추인 것’이라고 했지만, 궁극적으로 비유는 마치 등불이 모든 사물을 비추어 드러내는 것처럼 조명하고 계시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마가복음 4:30-32)”.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낟알에 비교되는 작고 초라한 시작과 풍부한 결실의 마지막이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 속에서 시작됐습니다. 아직은 작은 씨앗 같아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점점 더 분명해져 마침내 종말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뜻이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작은 시작을 통해 세계적 크기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작은 겨자씨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비교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미비하고 무력하더라도 장차 크게 확장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나라마다 살아가는 풍습이 다르고, 삶의 질 역시 다양합니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만 해도 세계 최빈국으로 허기진 배를 해결하지 못해 산이나 들로 나가 풀을 뜯어먹거나 술찌꺼기를 먹으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언제 그런 세월이 있었던 가 할 정도로 풍족한 시대에 흥청망청 쓰면서 살고 있지요. 조상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런 영화를 누리고 있건만, 오히려 못살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며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풍족하고 건강하고 행복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에 부치며 병이 들거나, 사업이 실패하고 다니던 직장에서마저 쫓겨나 불행해지고 나서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병과 실패를 맛보지 않았을 때는 모두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이룬 성과라며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까지 그냥 살다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초라한 모습으로 작아져 고통을 느끼고 극단적 선택마저 생각날 때, 비로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그분을 찾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자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작은 자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럽게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날마다 죄인들이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의협심과 정의는 겨자씨처럼 남들 보기에 작고 적어 초라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작은 자, 모든 일에 희망이 없어 보이고 실패만 거듭하며 고통과 억압으로 슬픔에 잠긴 자와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대수롭지 않고 보잘것없는 자들 안에서 빛나고 성장합니다.
우리가 이른바 작은 자가 되어 겸손하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탁하고 그분의 뜻을 고요히 묵상하며 헤아릴 때, 겨자씨처럼 지금 당장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장차 큰 나무가 되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됨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으며 소망합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 눈에는 믿음으로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겨자씨처럼 아직 부족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됐고, 모르는 사이에 겨자씨는 점점 자라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셨다면 누구도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었고, 누구도 죄를 지을 자 없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 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명기 6: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 이례적이며,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잘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질투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에 등장하는 감정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아내 될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면, 분명히 질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꿔 말해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무게나 부피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려면, 우선 의협심(義俠心)이나 정의(正義)가 가슴으로부터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의협심을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이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희생적인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국회를 비롯해 국가기관이나 모든 단체는 저마다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만 바쁘고, 나라 발전과 국민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투쟁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 개탄스럽습니다.
특히 국회는 국민들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방해가 되는 법 제도를 개선하고, 나라 안보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백성을 위하는 데만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기만 해도 시간이 촉박한데, 야당 의원들은 오롯이 당 대표를 위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내로남불로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을 왜 당선시켜 줬는지 한탄스럽습니다.
국회는 마땅히 대한민국 헌법 정신 아래 여러 법률들을 지켜야 하는데, 법을 이용하고 교묘하게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겁한 국회의원들의 민낯입니다. 그 당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눈도 코도 귀도 없는지, 뻔뻔한 거짓말과 꼼수, 사기 등을 보고도 아무 소리 못하는 한통속 같습니다.
요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의사협회는 뭐하는 집단들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환자 곁을 지키겠다는 의사들이 여전히 많다는 짐입니다. 정의가 살아있음을 퍽 다행으로 생각하며, 의사는 자신들의 사명을 잊지 말고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의사가 부족해 국민 생명이 위협받아 국가가 나서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겠다는데 전공의들이 밥그릇을 챙기려고 반대 농성을 하고, 교수라는 자들까지 부화뇌동(附和雷同)해 선봉에 나서 사표를 내고 학교와 병원을 떠나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의사 숫자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국가와 국민들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환자 곁을 떠나면,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환자를 이익 수단으로 삼는 의사는 의사를 가장한 유사 의사, 곧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환자 생명을 볼모로 잡고 자신들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스런 유사 의료인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옳지 않은 일에 분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협심과 정의가 살아있는 신앙인들과 이 땅 국민들이라면, 희망이 되살아나고 사랑의 꽃향기가 충만한 사회로 물들어,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나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는 야당 대표 한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떠나, 오롯이 국민만 바라보는 국회의원들이 되십시오. 우리 대한민국은 5천 년 역사 중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아픔과 고통, 참혹한 죽음을 견디면서 조국을 지켜냈습니다. 난세의 영웅인 국민들이 똘똘 뭉쳐 강하고 담대한 의협심과 정의로 굳건히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저지르는 이러한 만행들을 조상들이 안다면, 지하에서 얼마나 통곡을 하고 있겠습니까? 재판이 불리해지면 판사를 탄핵하려는 저 무지한 자들을 보십시오. 눈물과 땀과 피로 지켜낸 조국을 저들이 파탄내고 있으니, 조상들의 숭고한 의협심과 정의의 기치는 어디로 실종되었는지요.
숱한 고통을 감내하며 지켜온 이 땅의 조상들과 현 국민들을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한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나라를 굳건히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부자일수록 가난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마음이 따뜻하고 영혼이 순수한 사람들은 소외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어둠을 밝히려 제 몸을 녹이는 촛불처럼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참된 의협심과 정의감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행동하는 작은 겨자씨 되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