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 바티칸의 게으름이 종교개혁 성공의 원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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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칼럼] 르네상스(7)-로렌초 디 메디치

▲라파엘이 그린 교황 레오 10세. 왼쪽은 조카이자 훗날의 클레멘스 7세 교황.

▲라파엘이 그린 교황 레오 10세. 왼쪽은 조카이자 훗날의 클레멘스 7세 교황.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공화국을 이끌면서 교황과 여러 번 맞서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가문을 든든히 지키기 위해서 교황청에 줄을 대야 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래서 로렌초 메디치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아들 요한을 추기경에 앉혔다. 당시에는 힘만 있으면 어린 나이에도 추기경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대체로 리더십과 인품이 탁월해야 추기경들의 지지를 통해 뽑힐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역사를 보면, 재물이 많으면 당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이유는 유력한 후보를 돈으로 매수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15세 된 딸을 38세의 현직 교황의 사생아와 정략결혼을 시키는 대가로 아들을 13세에 추기경에 서임받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린 딸을 교황의 사생아에게 시집 보낼 때 두둑한 지참금(현재 시가로 8백억)도 잊지 않았다.

당시는 바티칸을 건축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돈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때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신참 주교가 부임하게 되면 1년치 사례비를 모두 교황청에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유럽에 주교 수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도록 하고, 또한 주교의 임기를 줄여 이동의 횟수를 많게 함으로써 수입을 늘리기도 했다. 또한 필요할 때는 한꺼번에 주교 몇십 명을 서임해 모자란 재물을 보충했다. 이런 탐욕스러운 방법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만든 원인이었다.

중세의 교황은 돈과 외교적 역량 없이는 그 직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다. 도시국가의 통치자들과 유럽의 왕들을 항상 견제하고 또 조율해야 했고, 그 힘든 일을 성사하기 위해 뛰어난 판단력과 때로는 큰 물질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인데도 추기경들은 서로 신의 대리자라는 교황의 자리에 앉아보고 싶어했다. 메디치가의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38세에 교황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사촌동생 줄리아노에게 외쳤다. “신은 우리에게 교황직을 주셨다. 이제 함께 즐기자.”

그러나 그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추기경으로 풍부한 소양과 다양한 지식을 쌓았고, 특히 아버지 로렌초 메디치의 영향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사랑했고, 학문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전기 작가는 레오 10세의 통치 기간을 황금기로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인 메디치를 중흥시키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래서 사촌 두 명과 조카 세 명을 추기경으로 서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자리에서 돈을 물 쓰듯 쓰고도 모자라,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 메디치가가 운영하는 은행에 큰 빚을 남겨야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추기경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했다고 발표해 여러 명을 죽였고, 또 그들의 옷을 벗겼다. 그러므로 31명이 넘는 추기경 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그때 루터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붙였다.

그 당시 바티칸은 아직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다고,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내면 죽은 후에 연옥에서 지내는 기간이 줄어든다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당시 바티칸에는 성직 매매로 인한 자리가 2,150개가 넘었을 정도였다. 제정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 돈이 필요하게 되면 원로원 의원 가운데 부요한 자를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체포하여 죽였고, 그의 모든 재산을 탈취했다. 교황도 그런 사나운 방법을 동원한 것 같다. 자신의 헤픈 씀씀이 때문에.

그런데 교황은 마틴 루터의 항거를 한동안 관망함으로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꼴이 됐다. 왜 발 빠르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또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제후들을 통해 압박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어떤 학자는 말했다. 바티칸 당국은 전통적으로 작센지역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었다고. 제정 로마는 게르만 장벽 이북에 사는 사람들을 무식한 자들로 치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예로부터 글도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예들이 과연 개혁을 꾀할 수 있겠는가?”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었겠다 싶다. 더구나 마틴 루터가 일개 수도사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교만한 생각에 개혁의 불길을 가볍게 보았고, 그랬기에 몇 년 동안을 대처하지 않았다. 그런 바티칸 당국의 게으른 대처가 개혁에 성공의 원인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만일 레오 10세 교황이 발 빠르게 대처했다면 개혁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당시 부패한 가톨릭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겠고. 레오 10세, 그는 준비된 교황이었으나 영국의 사학자 칼라일은 “그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 오히려 이교도였다”라고 갈파했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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