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9)-라파엘로
천재 예술가들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한 세대가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르네상스 시대 천재 예술가들은 가장 행복한 시절을 살았다 싶다. 직접적인 기폭제가 된 것은 흑사병의 발발이었고,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메디치 가문의 지속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많은 돈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즉 거대한 조각품이나 성당 벽화의 성서 주제를 위한 그림이나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속하여 의뢰하였다. 고로 예술가들은 밤낮 좋아하는 창작에 골몰할 수 있었고,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정황을 보고 재능 있다 싶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공방을 기웃거리게 되었고, 그런 자들로 르네상스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은 힘들고 배고픈데, 500년 전 메디치 같은 가문이 있었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는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행운이었다 싶다.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는 르네상스가 저물어 가는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이탈리아 동쪽 마르케 지방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이자 지식인이었다. 고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의 다양한 방법을 습득했고, 곧 그의 천재성은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1504년에 대가들이 모여 있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장점들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부여한 특징을 지녔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그가 자신의 그림을 카피했다고 구시렁대곤 했다.
라파엘은 그림도 잘 그렸지만, 뛰어난 미남으로도 유명했다. 천재들은 어딘가 괴팍한 부분이 있는데, 라파엘은 성격도 좋아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좋아했을 정도였다. 어떻게 라파엘 한 사람에게 그런 다양한 은사를 부어 주셨을까 싶다.
그는 이미 BTS 같은 인기와 명성을 가졌기에, 그가 로마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귀부인들은 너도나도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초상화를 부탁하려고 했다. 실은 초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주 앉아 교제를 나누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를 만난 자는 그 만남을 한껏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니 예술가들이 얼마나 그를 시샘하고 질투했을까 싶다. -특히 안 생긴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품 좋은 그를 로마로 불렀고, 그에게 많은 일감을 맡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일을 맡기면 잘 마치지를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자존심이 강하고 괴팍하여 말 걸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대단한 천재로, 독특한 개성은 당연한 거라고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같은 천재인 라파엘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괴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이 그를 로마로 불렀던 때는 바티칸의 공사를 맡은 브라만테가 이미 세상을 떠난(1514) 때였다. 라파엘이 로마로 부름을 받아 그린 유명한 그림은 아테네 학당(1509-1511)과, 교황 율리우스 2세(1511-2)와 레오 10세(1517)의 초상화(1511-2)다. 그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은, 당시 화가들은 대부분 그리려는 모델이 있었으나 라파엘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어떤 생각을 따라 그렸다고 했다. 고대의 아름다운 조각상에 자신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가미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이 언급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데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필요한 대로 꺼내서 그릴 수 있는-
로마의 귀부인들은 그에게 서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달라고 강권했기에, 그는 일 년 열두 달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는 심성이 여려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혹사로 많은 그림을 남길 수는 있었으나, 건강에 무리가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추기경을 제수하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인체 묘사에서 최고의 높은 경지에 올랐다면, 라파엘로는 전 시대의 화가들이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미진한 부분,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조화롭고 완벽하게 구성한 천재적 화가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그가 화가로서 이루려고 몸부림쳤던 부분이 있다. 꽈트로첸토(1400년)가 넘어가고 친퀘첸토(1500년)의 세상이 되자, 인문주의가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런 영향은 회화에도 나타났다. 이전까지(14세기)는 그림의 주인공을 대체로 슬픔에 젖은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웃지 않으셨다는 부분에 천착하여, 14세기는 인물들을 우울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그렸다. 그 사실을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불리는 죠토(giotto, 1267-1337)가 그린,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 성당의 벽화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런데 2세기나 지난 후, 라파엘은 성모를 그릴 때 가슴을 봉긋하게 묘사했고, 더 나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의 눈빛을 농염하게, 아기 예수를 평범한 어린아이로 그렸다. 전통적 묘사에서 이런 식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신비스러움을 모두 걷어낸 인간의 본질, 이런 식의 발전은 곧 이성을 극대화하는 인문주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을 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사상은 신을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허구라는 자리까지 나가게 했다. 그런 일에 라파엘도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르네상스의 미술대전(1550년)을 쓴 화가이자 우피치 궁의 설계자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는 라파엘이 추기경에 되려는 욕망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네 명의 추기경이 그의 시신을 운반했고, 그의 손에 교황이 입을 맞추었다. 판테온에 있는 그의 석관에는, “여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 자연이 정복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그가 죽을 때 자신도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 유명한 라파엘이 잠들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가 추구한 자연주의는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