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나를 보는 지혜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지혜와 교훈을 강조하면서 조건을 달아 놓았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한 것은 신체 부위로서의 귀가 아니라 듣고자 하는 마음의 귀 경청하는 태도와 자세를 이른 말이리라.
우이독경(牛耳讀經, 소 귀에 경 읽기)이란 말도 듣지 않으려는 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말일 것이다. 성경에도 돼지에게 보물을 던져주지 말자는 말이 있다.
우리 눈은 전면을 향해 있기에 자기 자신의 눈썹을 볼 수 없다.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자기 눈으로 자기 눈썹은 볼 수 없다. 제대로 보려면 적정한 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보려면 되비쳐 주는 거울을 통해 보거나 나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의견·소감)을 통해 자기 모습이나 상황을 볼 수(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조정민 목사의 잠언록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자화상)을 되비쳐 보려고 한다. 말 속에 의미(뼈)가 있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①학이 다리를 접고 천 년을 묵상해도 물고기 한 마리가 전부이고, 사자가 평원을 가로질러 질풍노도처럼 달려도 얼룩말 한 마리 쫓는 것이 전부이다.
②변명하는 삶이 성공하는 법은 없다. 변명은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을 실패를 확정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③갖고도 나누지 못하면 가난한 것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바쁜데 열매가 없으면 게으른 것이다.
④다툼은 언제나 주도권 싸움이다. 갈등은 결국 누가 더 큰가를 따지기 때문이다. 투쟁은 늘 더 많은 몫 때문이다. 그러니 이겼다 해서 옳은 것도 아니고 졌다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22대 국회에서 여소야대의 현상이 생겼는데 여당은 무력감에 빠져 속수무책이고, 야당은 오만방자하여 무소불위로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려 한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요 오만이다. 힘을 절제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갈 땐 스스로 모순에 빠져 망하게 된다.
특히 국회의원 중 일부는 자기 앞에 있는 상대만 이기면 되는 줄 알고, 함부로 말하고 처신하는데, 그 장면을 많은 국민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두고두고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그는 이미 망한 것이다. 이겨놓고 지는 것이 그렇게 쉽다.
⑤다투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I am OK, you are not OK)고 주장하는 것이다. 헤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는 절대 옳고 너는 절대 틀렸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절대로’ 이 세상에서 절대로 옳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뱃속에 금덩어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⑥나는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좋다. 생각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참 좋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좋다. 그러나 책임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일 뿐이다.
⑦숫돌이 쇠를 갈아 날카롭게 하고, 단순한 가르침이 탁월한 지도자를 만들고 어리석어 보이는 순수함이 깊은 지혜를 낳는다. 내가 낮아지고 내가 배우고자 하고, 내가 변하고자 하면 결국 그렇게 할 수 있다.
⑧비난은 양날의 칼이다. 나를 먼저 베지 않고는 남을 벨 수 없는 칼이다. 내가 피를 흘리지 않고는 남의 피를 흘릴 수 없는데, 할 수만 있다면 비난을 피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
⑨인간이 바꿀 수 없는 것은 없다.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그러나 바꾸지 않기로 고집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꾼다거나 고친다(改善, 改草)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 좋고 하던 대로 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어제와 똑같이 행하면서 오늘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