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11)-인문학의 발견
13세기는 큰 변화를 요하던 시대였다.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바티칸의 요청에 전 유럽은 동의했다. 각국이 의견의 일치를 보기란 어려웠지만, 이번 일 만큼은 모두가 찬동했다. 성전에 참석하는 자들은 연옥에서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는 달콤함을 첨부하기도 했고. 당시 영적 지도자로 큰 권위와 존경을 받던 클레르보 베르나르도 수도원장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전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절대적 지지를 하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 교황은 이 성전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전대사(모든 죄를 사해 주는 가톨릭의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파격적인 선포도 했다. 고로 십자군은 출병부터 승리를 위한 성직자들의 축복 속에 엄숙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당도하기만 하면 홍해가 갈라지듯 기적이 일어나기를 꿈꿨을 것이다.
유럽의 각국 왕들과 영주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주교들의 축복 속에 당당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전쟁은 무려 200년 가까이 지속됐다(1095-1291). 거기에 들어간 비용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목적한 대로 성취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잠시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가 곧 빼앗겼고, 그 후 10차까지 출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유럽 각국은 지나친 전쟁 비용으로 피폐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후원한 영주들은 파산하였고, 중앙집권제가 강화됨으로 왕권이 강력해지는 변화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무모한 전쟁의 순기능도 있었는데, 출정하는 군대가 거쳐가는 지방들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무역로로 인한 상업의 활성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아랍에서 수입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에 큰 관심을 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3세기에 플로티노스에 의해 신 플라톤 사상이 로마에서 전파되었었지만, 웬일인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십자군으로 인해 재수입되었고, 지성인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인문주의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 학문이야말로 구원의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유는 십자군을 지원하였는데 실패하였고, 승리의 탈취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정 로마 시대처럼 승리하여 어마어마한 영토를 취하고, 탈취물들을 마차에 가득 싣고 바티칸으로 돌아와 멋진 보고를 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말이다.
그런 실망감에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을 배제하게 되었고, 인문주의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지 50여 년 만에 병명도 알 수 없는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는 재난 앞에서, 기독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또한 교황청은 자신들의 권력 다툼으로 리옹으로 자리를 옮겨갔으니, 사람들은 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그리스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이성에서 찾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큰 고난을 겪을 때 두 가지 극단적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더욱 열광적으로 신을 구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신을 외면하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르네상스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큰 재앙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자신들의 영혼들이 연옥에서 단련받는 기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공로를 쌓아야 하고, 그것은 곧 교회를 건축하거나 성화를 그리도록 헌신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재력이 있는 자들이 그런 일에 헌신하였고, 경쟁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 헌신들이 예술가들의 창작열을 불태우게 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는 수많은 걸작을 잉태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역기능인데, 인문주의를 통한 이성의 극대화를 들 수 있겠다. 저들은 이성을 훈련하고 연마하면 신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의 근본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이 연금술과 점성술(천문학 포함)이었다. 즉 별자리를 통해 미래와 운명을 알 수 있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던 흑사병의 도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방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이탈리아는 화산지대로 지진의 피해가 대단한 지역이다. 산마루에 다닥다닥 감싸고 있는 마을은 지진이 일어나면 피해가 크다. 고로 지진의 현상을 미리 알 수 있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해결책인가! 그러나 그런 해결책은 르네상스 이후 5백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찾지 못했다. 인문학은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었으나 근본적은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을 새로운 상황으로 이끌었다. 즉 십자군 전쟁에 군비를 쓰고 군대를 파병한 제후나 공작들은 더 이상 여력이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상인들의 신흥 세력이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200년 가까이 전쟁을 치렀으나 승리로 인한 전유물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르게 되자 난감한 것은 바티칸 당국이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소위 예언한다는 자들이 선동하여 신의 뜻이라고, 반드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기독교의 소명이라고 외쳤는데, 그 목적을 위해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는데, 승리의 팡파레는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을 잠시 탈환하였으나 곧 원위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더욱 자존심도 상하고 뼈아픈 일이었다. 이유는 기독교의 전 유럽 합동작전이 당시의 패권자 셀주크 튀르크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후 봉건 영주들의 세력이 무너지고 대신 왕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전쟁의 영향으로 유럽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강력한 자치권을 형성했다. 상업 도시들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베니스, 밀라노, 피렌제 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길드를 조직했다. 그래서 교회사가 워커는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 문화와 통상교류 외에 세계를 향한 안목이 넓어졌고, 교회 내 개혁 의지들이 일어났고, 대학들의 설립, 그리고 스콜라주의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히려 역기능도 있었는데 십자군들을 통해 퍼진 것은 역병 콜레라와 매독이었고, 학문적으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교황권의 쇠퇴였다. 교황은 로마에서 리옹으로 이전하여 바벨론 유수라고 불렸다. 교황 중에는 한 번도 로마를 방문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당한 현장인 로마는 영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기에, 프랑스 왕에 의해 리옹으로 이전하고 계속하여 프랑스 출신들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상황을 신성로마제국에서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