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처럼만
남자들 사이에서 배우자나 자식 이야기를 할 때는 스스로 ‘팔불출’ 운운하며 머뭇거리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통상적 모습이었다. 남자들이 오죽 할 말(대화 소재)이 없으면 집안에서 있던 일들을 울타리 밖에서 언급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는 아내의 역할과 발언권이 신장되면서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우월 수준까지 가게 되었다. 최근 ‘인명재처(人命在妻)’나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 진인사대천명 패러디)’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만 봐도, 남녀(부부)의 위상변화가 실감 난다.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여야 정치인들이 전·현직 대통령의 부인 이야기를 듣고 특검을 하자는 등 정치 공방을 이렇게 오랫동안 벌이고 있는 것은 좀 치졸해 보인다.
정상적인 남자들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남의 부인 이름을 이렇게 날마다 떠들어 대는 사람들은 남자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좀 안됐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역대 영부인들을 생각해 본다.
①여론을 정확히 전달한 청와대 안의 야당 육영수 여사- 충북 옥천 부잣집 딸인 그는 한국 전쟁 중 피난 간 부산에서 이종 6촌오빠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났고, 1950년 12월 12일 대구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박정희 중령은 막 새로 창설된 9사단 참모장이었다. 그녀는 부잣집 친정 도움 없이 절약과 저축으로 6년 만에 서울 신당동에 20평짜리 낡은 양옥집을 마련할 정도로 알뜰했다.
1963년 12월, 38세의 젊은 나이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된 육영수 여사는 밤낮없이 바쁘게 지냈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아침 식사 전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메모하고, 조간 신문을 읽으며 밑줄을 그어 남편에게 보고했다. 집무실에선 편지를 읽고 일일이 답장을 썼다.
점심 시간에는 외부 손님을 초청해 함께했다. 오후엔 외국 손님은 물론이고 각 단체장이나 시골 벽촌 아이들과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저녁식사 후에도 석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체크하고, 자녀들과 대화한 후 오후에 배달된 편지를 읽느라 새벽 1시까지도 일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아이들(박근혜, 박근영, 박지만)에게는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보통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들 박지만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해 교실 앞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30여 분간 혼자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수업이 끝난 후 교실을 둘러보고 교실 창문의 커튼을 걷어와 직접 빨아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1972년 광복절 기념 행사장에서 북한 앞잡이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지기 전까지, 육영수 여사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이 전해졌다.
한 번은 아들 박지만이 청옥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이 박지만을 둘러싸고 그의 도시락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대통령의 아들은 과연 어떤 반찬을 싸올까?”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시락 뚜껑이 열리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박지만의 도시락에는 보리쌀 섞인 혼분식에 김치 깍두기와 소세지 몇 점이 전부로, 일반 학생들의 도시락과 같이 너무 평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육영수 여사는 대통령인 남편의 의도와 다른 견해라 할지라도 시중 일반 여론을 정확히 전달하는 등 ‘청와대 안 야당’ 역할을 철저히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국 각 지역을 찾아 소외된 사람들을 챙기고 돕는 자선 봉사활동을 계속해 왔다.
개인적 사리사욕에 빠지기 않았기에 역대 영부인 가운데 가장 청렴하고 훌륭한 부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중 청와대나 영부인 관련해 돈 문제나 사치한 일로 문제 된 적이 없었다. 혼자 외국 여행을 한 적도 없고 수많은 옷을 샀다는 말도 없으며, 어디에 돈을 투자했다거나 무슨 선물을 받았다는 말도 없었다.
더구나 공적으로만 쓰게 돼 있는 법인카드로 초밥을 주문해 먹었거나, 조상들 제삿날 제수용품까지 샀다는 말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많은 공직자들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특히 부인의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
여하튼 부인 문제 갖고 특검 공방을 벌이는 일은 너무 창피하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