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상에 이런 일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7)”.
보통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라고 부릅니다. 본 장에서 주님은 천국 시민의 요건과 그에 상급을 약속하시며, 모세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명령을 제시하십니다.
특히 산상수훈 말씀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높은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실제 삶에서 지켜야 할 윤리의 대강령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5장 7절 말씀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깊이 느끼고 그 불행을 회복시켜주는 자를 말합니다.
이 시대 회복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한 사람이 있어 그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017년 4월 3일 크리스천투데이를 통해 친구의 ‘대추나무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한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친구와 저는 초·중학교 동창으로, 매주 목요일 부산 부전역 앞에서 함께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많은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 배워야 할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친구 건물 옥상에 어느 때인가부터 대추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어, 친구는 지인들과 함께 제게도 나눠줬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 뿌리와 나뭇잎이 건물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나무를 옮기거나 베어야 할 지경까지 이르러 필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기에, 구청이나 동사무소 산림계에 문의해 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지고 가도록 하려 했지만, 경비가 많이 들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이 친구는 나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대형 장비를 이용해 나무를 옥상에서 내려 원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장비 사용료로 80만 원을 내면서까지 애지중지하며 나무를 아래로 내렸습니다.
때마침 이웃 농장에서 나무를 가져가겠다고 해서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죽어서 버려져야 했던 대추나무는 친구의 사랑으로 새로운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식물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친구의 도움으로, 대추나무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지금도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으며, 많은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필자는 매주 이 친구와 1주일에 3번씩 만나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데, 한번은 친구가 종이박스에 무거운 뭔가를 들고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무더운 날씨에 왜 이런 걸 들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대추나무 사건 이후 놀랍게도 그 자리에 다시 복숭아나무가 자라기 시작해 수확한 복숭아를 가지고 왔으니, 집사람과 나눠 먹으라며 한 보따리 나눠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필자는 너무 놀라워, 멍하니 친구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친구의 긍휼히 여기며 베풀고 나누는 삶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애지중지 키워온 대추나무를 새 주인에게 주면서 어떤 대가나 조건도 달지 않은 아가페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 씨앗이 바람에 날아왔을까요? 새가 물어와 흘렸을까요? 마치 흥부와 놀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 친구는 1991년 1월 경 구정 연휴를 맞아 고향인 진주로 내려간 사이, 서울 본집에 있던 부인과 딸, 장인·장모, 처남댁까지 화재로 목숨을 잃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딸 둘 중 하나만 목숨을 건지고 나머지6명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고 오롯이 믿음 하나로 잘 극복해낸 모범적 신앙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친구입니다.
당시 친구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부인과 아들 한 명과 딸이 있는데, 딸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결혼을 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치러 한 해 먼저 대학에 입학했으며, 대학도 다른 동기들보다 1년 빠르게 졸업해 ROTC 장교로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치매로 고달프게 살고 있는 처형을 집 근처로 이사하게 해 아침·점심·저녁 삼시세끼 함께 식사하면서 정성껏 보살피는 친구 부부의 정성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특히 그는 국가관이 철두철미하며 정의와 공정을 중시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베풂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자연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플라스틱 제품을 피하기 위해 커피도 반드시 컵에 부어달라고 부탁하며, 쓰레기 줄이기와 탄소 배출에도 많은 관심과 실천을 하고 있는 아주 모범적인 친구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살 가까운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효를 그치지 않아, 요즘 사람 같지 않은 모범적이고 충효사상이 물씬 풍기는 친구입니다.
혹 친구들이 무슨 해를 당하거나 이웃들이 고초를 겪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아픈 사람들의 치유를 도와주고 병을 이길 방법이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고, 잘못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거침없이 충고하며, 불의를 보면 외면하지 못하는 그런 친구입니다.
거짓말과 오리발, 모르쇠와 뻔뻔함, 온갖 거짓선동, 실수나 실패도 남 탓, 거짓말과 가짜, 엉터리, 사기 치다 걸리면 오리발, 나라가 망하건 말건 내 욕심만 채우기, 권력을 잡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 쓰는 요즘 정치판을 보면, 사랑하는 이 친구를 스승으로 삼아 국민만을 바라보고 정치하길 바랄 정도입니다. 범죄자들이 판치는 집단보다, 차라리 이런 친구들을 제대로 찾아서 정치를 하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한복음 6:41-42)”.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은, 인간들의 ‘익숙함’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성장 배경부터 부모나 친척들까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불신은 결국 시기와 모함,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누구와 비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비교는 멀리 있는 사람이 대상일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비교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불신앙을 타파하기 위해 일생을 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이 닿는 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을 갈라 놓습니다. 하늘나라에 갈 사람과 가지 못할 사람, 부자와 빈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의인과 죄인을 가릅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시기나 질투, 그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들이 불쑥 찾아와도 이를 믿음으로 잘 걷어내고, 오롯이 하늘나라 소망을 두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용기 있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신앙인들은 배워야 하겠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컸으면, 자연도 그 정성에 놀라워 빌딩 콘크리트 바닥에서 대추나무 열매를 복숭아나무로 재탄생시켰는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일이 아닌가 싶고, 친구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크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친구는 수불석권(手不釋卷), 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며 마음의 양식과 덕을 쌓는데 한 치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보편적 욕구 가운데 하나는 ‘지배욕’입니다. 계층을 뛰어넘으려는 심리, 지지 않으려는 경쟁 심리, 자존심을 세우려는 욕구 등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세상은 바람 잘 날 없고, 세상의 방식은 다른 사람보다 더 지배적이고 더 강력하며, 더 위협적이고 더 요구함으로써 먼저 되려 하는데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제 친구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으로 다가가면, 훨씬 수월하게 이웃을 만날 것이며 복음 전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하늘의 삶을 이 땅에서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서로의 마음 속에 와 있는 하늘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 사람들을 늘 하늘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주인공인 제 친구처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