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삶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요한복음 6:54-59)”.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기억하고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여기서 ‘살’은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 10장 16절, 11장 24·27·29절의 ‘몸’에 상응하는 말입니다.
‘몸’과 ‘살’이라는 말에 차이가 있다면 ‘살’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조하고, ‘몸’은 유기적 실체로서 그리스도의 인간 됨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점입니다.
58절에서 그리스도와 율법, 생명의 떡과 만나의 차이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떡이신 주를 영접한 자라야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생명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59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회당’ 앞에 관사가 없어서, 건물이 아니라 예배 행위를 하는 집단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 활동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적과 기사와 가르침에 감탄해 그 분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생을 위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자, 일부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외면한 채, 그들의 뜻과 생각과 판단만으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살아가는 힘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좌우됩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 쾌락에 빠져 거기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고, 성공을 향한 집념이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사랑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는 표현이 말해 주듯, 사랑은 어떤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도 극복하게 하는 가장 큰 힘과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나누는 사랑에는 한계와 제한이 있고, 그것은 변화무쌍해서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것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셨기에 하나님이 당신 삶의 의미였고 이유였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이고 행복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듯 우리 또한 살아있는 생명의 떡이신 당신을 먹고, 당신을 먹음으로써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삶으로써 우리 또한 당신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지금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물론 신앙은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닐 것입니다. ‘평양 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고, 아무리 좋은 성경적 가르침이나 권고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일상과 신앙 사이를 오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속을 쫓아 살면서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이중적 삶의 태도는 분명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이 과연 무슨 힘으로, 어떤 힘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믿는 신앙인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찢어 우리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주님을 위해 무엇을 나눠 드려야 할까요?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참된 양식이자 참된 음료이신 주님을 먹고 마심으로써 십자가의 큰 뜻을 마음 깊이 아로새길 때입니다.
오늘 유튜브에 귀감이 되는 좋은 글이 올라와 소개합니다. 제목은 ‘예수님의 학력’. 1865년 제1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 1808-1875)’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13세 때 양복점에 취직하고, 17세에 양복점을 차려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의 딸과 결혼 후 부인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공부를 취미 삼아 다방면에서 교양을 쌓은 뒤, 정치에 뛰어들어 테네시 주지사, 상원의원이 된 후 링컨 대통령을 보좌하는 부통령이 됩니다.
1864년 16대 대통령 링컨이 암살당하자 잠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가, 이듬해 17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합니다. 그는 유세장에서 상대편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한 나라를 이끌고 나갈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말이 되느냐는 공격이었습니다.
앤드루 존슨은 언제나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전 세계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 한마디로 상황을 역전시켜 버립니다.
“이 나라를 이끄는 힘은 학력이 아니라, 정직과 긍정적 의지의 힘입니다.” 그는 국민들의 열렬한 한호와 지지로 당선됩니다. 그는 재임 시 구소련 영토였던 ‘알래스카’를 단돈 720만 달러에 사들이려 했습니다. 국민들은 얼어붙은 불모지를 산다고 협상 과정에서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 땅은 감추어진 무한한 보고이기에 다음 세대를 위해 사둡시다”라며 국민들과 의회를 설득하여 찬반 투표로 알래스카를 매입합니다.
오늘날 ‘알래스카’는 미국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천연가스, 석유, 금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미국의 보고가 됐고, 그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신뢰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됐습니다.
입만 벌리면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정직하고 긍정적이며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 현실을 보며, 앤드루 같은 지도자가 있었던 미국의 나라는 참으로 복 받은 민족입니다. ‘노예 해방’이라는 실로 엄청난 일을 해낸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성실하고 정직해 지도자로서의 성품과 인격을 고루 갖춘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노라면 입을 열어 말하기조차 싫을 정도이고,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지경입니다. 앤드루 존슨 같은 위대한 인물 뒤에는 그를 일깨워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격과 덕목이 두루 갖춰진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이룩한 이승만 대통령, 5천 년 동안 헐벗고 굶주렸던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며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으로 진입하게 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무시하며 심지어 무덤조차 버림 당했습니다. 좌파는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내로남불과 포퓰리즘에 빠져 늘 달콤한 유혹에만 귀를 기울이며 그 속에 흠뻑 빠져 있으니, 머잖아 나라가 망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준엄한 법의 심판으로 이들을 속히 가려내 조상들이 일궈놓은 나라를 다시 한 번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법을 지키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그저 법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가족 친지들, 소속 정당이 범죄를 저질러도 피해가려고만 하고 있으니, 그게 변호사요 검사요 판사며 교수들인가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일수록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최근 국회법제사법위원회 검사 탄핵 청문회에서는 전현희 의원이 권익위원회 고위 간부 사망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살인자’로 지칭하는 발언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권익위원장을 지낸 분이 자신의 부하였던 간부의 사망 소식에 애도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일텐데, 오히려 자신은 성실하게 근무했다고 자랑하며 격한 발언을 꺼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재명 당대표 최측근들의 사망에 대해서는 왜 한 마디 말씀도 없는지요? 그 사건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대표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어찌 그에 대한 말씀은 일절 없는지 궁금합니다.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 부딪히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사회생활을 보면 참으로 슬픕니다. 비신자들과 함께 일할 때 모습을 보면, ‘저 분이 정말 크리스천일까?’ 하고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단체생활에 협조는커녕 이기적이고, 배려라는 단어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 됐으며, 양보심은 교회 안에서만 있고, 직장과 세상에서는 자신이 남보다 우월해야 하며, 특히 이웃을 사랑하고 헤아리는 마음은 실종됐고, 오롯이 자신만의 안일과 이익을 위해 살아가며, 입술로 사랑한다 하지만 얼굴에서 표출되는 악한 모습으로 교회 안에서만 천사처럼 보이는 ‘이중 교인들’이 활개를 치며 하나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올 여름 무더위는 연일 신기록을 갱신합니다. 지구의 위기는 더 다급해졌습니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욕망, 탐욕이 빚어낸 결과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구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가속도가 붙어 더 빠르게 멸망을 재촉하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종말론자들이 합세하고 사이비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룩한 약속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성취되는 것임을 믿고, 신앙인들은 주님의 신실한 골고다 십자가를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아로새기며, 주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십자가 정신과 사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삶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