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넷째 주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우리”.
제가 두어 주 동안 설교하고 축도만 했지 바깥에 나가서 일일이 성도들과 악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설교를 부목사님들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예배 때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저한테 와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종암중앙교회 장로이고 권사였습니다. 그런데 용인 쪽으로 이사를 와서 한동안 종암중앙교회를 다니다 너무 멀어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런데 새에덴교회가 우리 동네에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그걸 알고 나서부터 우리 교회로 오기로 작정을 하고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2주 동안 새가족 영접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에 본인들이 저에게 와서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 다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네요. 종암중앙교회로 가는 게 맞지만 거리상 거리가 너무 머셔서 어쩐대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제가 얼마나 조경대 목사님을 잘 섬긴 줄 아세요? 교회 오실 때마다 축도로 모셨고 평일에 오셨을 때도 한 번도 빈손으로 보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바쁜 중에도 조경대 목사님의 천국환송예배를 제가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조경대 목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애써 심고 양육하고 훈련시켰던 이런 중직자를 저에게 보내주시네요. 정말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세심하시고 정확하신 분이셔요.”
제 방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니,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라는 글을 읽은 게 기억이 났습니다.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동일하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이 법칙에 의하면 질량으로 규정되는 모든 보이는 물질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물질 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은혜, 창조주가 제정해 놓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지 않습니까?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갈 6:7-8).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잊어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응답하셨다 하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느 누구든지 1개월이나 2개월 만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10개월 동안 마리아의 몸에 계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창조의 법칙입니다.
사과 씨를 심으면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과수원 지기에게는 크로노스적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의 결재가 나타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제원호 교수님에 의하면 이미(already)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걸 아직(not yet)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적인 강도가 있습니다. 그게 사탄입니다. 사탄이 자꾸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 말씀을 교묘하게 변형을 시키거나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이라(갈 6:9)”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저는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를 통해, 심고 거두는 법칙, 물리학적으로는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정말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 것은 저 역시도 이미와 아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이라고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함께 이 글을 읽으면서 한 번 이렇게 외쳐보면 좋겠습니다. “내게 아직의 축복이 남아 있어. 내게 아직의 은혜가 남아 있단 말이야.”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