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청과 들음의 자세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0, 66-69)”.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와 가르침에 감탄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생을 위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자, 제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이 대부분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란 제자들의 불평은 예수님 말씀이 난해하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는 바로 뒷말이 그것을 증거해 줍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만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고 자격을 갖춘 분으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성도들의 일상생활에서 특히 교회 안에서 서로 마주보며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할 때 상대방 눈과 얼굴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한 채 입으로만 인사를 하고 있다면, 신앙인으로서 함량 미달이 아닐까요?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눈과 얼굴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눈과 고개는 다른 곳을 향한 채 입으로만 인사나 대화를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썩 좋지 못한 인상만 남길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찬밥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인 ‘경청(傾聽)’이란 남의 말을 잘 들어 준다는 의미로,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자신의 인격에 대한 도리라고 합니다. 경청은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친구가 많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을 거르지 말고 잘 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을 사람들에게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잘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려는 내용은 물론이고 그 내면에 깔린 동기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잘 피드백(feedback)해야 합니다. 이러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참으로 중요한 기법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고, 세속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필자는 어린 시절 무협지를 많이 보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스승과 제자가 있었습니다. 제자가 무술이나 학문이 능통해지면, 스승은 제자에게 하산할 것을 명합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청운의 꿈을 펼칠 기회를 갖거나, 부모나 형제의 원수를 갚곤 했습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 4:9)”.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실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필자는 듣지 못하는 청력장애자로 오랜 기간 적잖은 애로를 겪었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으면 전혀 들을 수 없고, 착용을 해도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목사님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해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반면 하와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에게서 독립해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내세우는 삶을 살고자 하면, 반드시 사탄의 시험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어 보려는 마음이 싹텄다는 것은, 사람의 자아가 하나님 중심의 교훈에 순종해 살기를 게을리했거나 거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삶에는 사탄의 거짓 교훈이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 안에는 거짓과 권모술수가 만연합니다. 국민들의 호소는 듣지 못한 채 교만과 아집으로 나라를 위기 속으로 몰아가는 이들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 음성을 무시한 채, 사탄들의 거짓된 소리를 듣고 멸망으로 향해 치닫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라도 국민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제받지 못하는 낭패를 겪게 될 것입니다.
듣지 못함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육신의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데, 더 불행한 것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신앙인들이라면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귀가 아닌, ‘들을 귀’ 있는 십자가의 선민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 자연으로 나아갑니다. 그 자연에는 맑고 청아한 시냇물 소리와 산새소리, 이끼 낀 돌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물소리, 낙엽 밟는 소리와 낙엽이 뒹구는 소리, 꽃가지에 내려가는 빗소리 등 온통 저마다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신실한 사람, 속은 검은데 겉만 깨끗한 체 하는 이중적인 사람, 소리는 똑같은데 듣는 귀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 속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닫고 있는지요?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분께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참 스승을 만났어도, 제자가 그의 곁을 떠나간다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를 떠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승의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열망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스승은 깨닫고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 듣고 깨달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깨달음은 그럼에도 제자가 스승의 깨달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잘 듣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며 사람들이 떠난 이유가 이것입니다. 스승의 말씀이 거슬려 결국 떠나간 것은 그들의 ‘경청’과 ‘들음’의 자세가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에, 믿지 않는 자들은 듣지 않은 자들입니다. 스승의 말을 듣되, 듣지 못한 자들은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쌓아가면서 깨어지고 흩어진 지식들을 진리라고 착각합니다.
화려한 언어들과 정교한 논리를 스승의 가르침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뜻에 스승이 동의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며 그것으로 부와 권력을 얻고자 하기 위해 스승을 배신하는 놀라운 사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건강을 위해, 자연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내 생각과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에서 들려주는 음성, 세상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는 연습을 하면 어느 순간 그들과 나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완전한 들음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스승의 깊은 뜻과 마음을 듣게 되고 그분이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제자도 더 이상 듣고 깨닫는 사람이 아니라 깨닫고 말하는 스승이 될 것이며, 스승과 하나가 되어 떠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특히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나 지금 시대나 자기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렇게 믿고 따르던 제자와 백성들마저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가곤 합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유일한 신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그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을까요?
주님께서는 병마로부터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 배고픈 자와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친히 그들에게 안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다정한 음성에 귀를 닫은 채, 권력과 출세를 바라고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대에만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런 기대와 점점 멀어지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과 백성들은 참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의 곁을 떠나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떠오릅니다. ‘꽃가지에 나리는 작은 빗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꽃가지에 나리는 작은 빗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 보세요/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
주일학교 시절 부르던 노래가 이제 70을 훌쩍 넘은 노년의 귀에 지금도 들려옵니다.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는 주님의 음성이 포근히 내 마음을 적셔줍니다.
‘경청과 들음’은 신앙생활에 있어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요 가르침임을 깨닫고, 오늘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신앙인들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