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사무엘하 12:5-8)”.
군 시절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 서두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새록새록 피어오릅니다. “드높은 가을 하늘 맑고 청명하기만 한데, 그 속에 사는 인간 사회는 너무나 혼탁하구나!” 그 시절 가을 하늘과 지금의 가을 하늘은 똑같은데, 인간의 탐심으로 인한 타락상은 더욱 짙어만 가는 것 같아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본문 5절에 ‘마땅히 죽을 자’라는 표현은 나단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일 놈’이라는 뜻입니다.
6절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는 출애굽기 21장 1절과 22장 1절에 언급된 이스라엘 사회규범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중 ‘소유권’에 관한 율법은 소를 훔쳤을 때 5배, 양을 훔쳤을 때 4배로 갚아야 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다윗은 이 같은 율법에 의거하여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변상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7절에는 오늘 주제인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단은 여기서 비유의 요점을 밝혔는데, 대단히 극적이고 효과적이었습니다. 나단이 빼어난 지혜로 비유를 들었기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부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나단의 경고를 끝까지 조용히 경청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해 나단에게 화를 냈을 수도 있지만,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남의 충고를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계속 변명하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8절에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사울의 아내를 취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계승자가 선왕의 아내들을 취하는 것은 관습이자 권리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일 년 동안 다윗이 하는 대로 방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게 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출생은 다윗의 죄악을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위에 전혀 무관심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로 하여금 양심의 큰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다윗이 겪은 양심의 가책과 심령의 고통은 시편 32편에 생생히 묘사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본성적으로 갈등과 고민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분별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엄격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냉정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합리화시키려 했습니다. 자신에게 한없이 관용적이면서 남에게는 무섭도록 냉정한 것이 죄인입니다.
본문 이후 11-12절에서는 다윗이 죄악을 은폐하려던 그 죄까지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을 선언합니다. 남의 부인을 빼앗은 사실에 대해선 다윗도 부인을 빼앗길 것이고, 은폐하려던 악행의 대가로 백주대낮에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섭리에는 예외가 없음을 신앙인은 물론이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깨닫고, 잘못을 깊이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는 말씀에선, 다윗이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 것 같습니다. 시편 51편이 이를 증거합니다. 다윗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간음죄 및 살인죄의 대가로, 밧세바와 다윗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좋지 않은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어른들의 인정 넘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나 하나 편하기에만 급급합니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스마트폰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요즘 온갖 범죄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많이 배운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머리가 좋으니 빠져나갈 구멍을 잘 찾아냅니다.
둘째, 돈에 눈이 먼 변호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악질 살인자를 무죄로 만드는 변호사가 최고 소리를 듣는 세상입니다. 악행을 저지르고도 비싼 변호사를 쓰면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셋째, 판사들이 법 정의를 상실했습니다. 친분이나 진영 논리에 기반해 엉터리 판결을 하는 사례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법관, 심지어 대법원장도 불공정과 비리로 지탄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넷째, 이성이 마비된 팬덤이 방탄벽과 보호막을 쳐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러니 범죄자들도 법을 우습게 알고 활개치는 것입니다.
통탄할 일은 범죄자들이 국회로 대거 진입한 것입니다.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을 이용해 법망을 피하기 가장 안전한 곳이 국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많아지니, 이제 적반하장으로 법을 집행하는 경찰과 검찰을 비난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특검으로 돌리려 생떼를 쓰고, 검사를 탄핵하겠다고 협박하는 실정입니다.
정의 사회를 갈망하는 국민은 이제 법망 대신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국민은 이제 천국만을 믿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공의로우심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은 분명 범죄자들을 반드시 심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며 국민들은 스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큰 그물이 던져지는 심판의 그 날이 반드시 다가온다는 기대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제 국민들은 뜻을 모아 법망을 수선하고 범죄자들을 단죄하며 정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 환자들을 팽개치고 집단이기주의로 나아가는 의사들을 보노라면, 치가 떨립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던 어린이들이 그 꿈을 이뤘지만, 무엇 때문에 의사가 되려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사명은 잊어버리고 이념에 치우쳐 환자를 돌보지 않습니다. 차라리 흰 가운을 벗고 다른 길로 가시는 게 어떨까 싶네요!
<동의보감> 주인공인 허준을 비롯해, 이 땅에는 많은 의사들이 자신의 행복을 뒤로 한 채, 오롯이 한 생명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숭고한 그들의 정신을 배웠을 텐데, 어찌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위기로 몰아가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의과대학 정원이 그렇게 자신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필자가 잘 아는 친구는 걱정과 한숨으로 매일 위기를 느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남편의 병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그들이 정말 의사인가요?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잘못된 사상과 철학으로 나라를 다 망쳐놓은 것도 모자라, 자신이나 가족의 죄를 수사하면 정치 보복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잘못도 없는 대통령을 촛불로 여론을 형성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게 한 장본인 아닌가요!
퇴임 직전 억대가 넘는 부부셀프 훈장에, 연봉 2억 4천만 원의 95%인 평생 연금에. 비서관 3인과 운전기사 1인에, 편법으로 농지를 전용해 지은 800여 평의 대저택과 경호동, 조경 사업, 인건비 등으로 국고를 100억 원씩 쓰고서 말입니다.
당초 경호원 27명을 60여 명으로 셀프 증원해 호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악질 공산주의자’라는 유튜브를 보십시오. 국민들의 비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퇴임 후 정부가 자신과 가족에게 지급하려던 연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돈은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했습니다. 무의탁 노인들과 고아원 어린이들을 위한 신탁 기금에 보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 두 전직 대통령을 비교해 보십시오! 과연 누가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았나요?
특검과 탄핵을 주업으로 삼고 일하는 더불어민주당을 보노라면, 환멸이 느껴지고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인가요? 지금 정치 때문에 국민들은 질서가 파괴되고 이웃 간 정다운 인심도 사라져갑니다. 애국심은 더욱 사라지고,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 속에 세월만 낚고 있으니 참 애처롭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들은 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몇 가지 치명적 실수를 범했습니다. 몇 안 되는 그의 실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하는 십계명을 명시하셨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이를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 명대로라면 다윗과 밧세바를 반드시 쳐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었기에, 율법을 어겼다 해서 감히 그들을 쳐죽일 자는 없습니다. 법의 집행자가 범죄자가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의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 우리의 실수는 용서받게 된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실수는 분명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단순히 죄와 심판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회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받아들이시고, 다시금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신앙과 용서, 회복에 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그들의 인물과 관계의 복잡성과 인간적 약점을 잘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신뢰와 희망을 부여합니다. 특히 교회와 사회에서 나단 같은 선지자가 많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왕께 나아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왕의 실수를 지혜롭게 지적한 나단 같은 충실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해 더 이상 범죄자들이 활개 치는 모습을 볼 수 없길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