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칼럼] 한국인 선조들의 국적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을 집필했던 최덕성 박사님이 최근 ‘일제시대 국적 논란’에 대한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이 글은 최덕성 박사님의 <리포르만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1. ‘금주가’에 등장하는 ‘국가’
일제 통치 기간 우리 선조들의 국가는 어느 나라인가? 근래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회는 근대 한국사 인식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얼마 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김문수 장관에게 ‘일제 국적’ 발언의 취소와 사과를 요청했고, 장관이 거부하자 퇴장시켰다.
역사에 대한 단일 시각만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국회는 전체주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문수 장관의 일제 조선 통치 기간, 한국인-조선인의 국적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연일연야 전 국민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이 주제는 강한 감정적 반응을 자극한다. 역사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냉철한 인문학적인 ‘과학’이다. 역사는 찬반 토론을 거쳐 진실에 다가간다.
한국교회가 일제통치 기간 애창했던 ‘금주가(1917)’에는 ‘국가(國家)’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태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4절)”. 이 ‘국가’는 어느 나라인가?
필자는 몇 해 전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를 <리포르만다>(2021. 2. 6)에 게시했다. 같은 글을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라는 제목으로 <크리스천투데이(2021. 2. 26)>에 기고했다.
이 글을 읽은 ‘금주가’의 작자 임배세의 후손 가족의 어느 분이 강하게 항의를 해 왔다. 금주가의 ‘국가’는 일본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는 필자에게 교정을 요청했다. 임배세가 생각한 그 ‘국가’는 어느 나라인가?
대한제국은 1910년 일제에 병합돼 사라졌다. 대한민국은 1948년 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출발했다. 한반도 주민 다수는 임시정부를 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금주가는 1917년 작품이다. 금주가에 등장하는 ‘국가’는 1919년에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금주가의 ‘국가’는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가?
임배세 후손의 항의는 근래 김문수 장관 후보가 제기한 “일제 시대 우리 조상은 일본 국민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거센 반발과 궤를 같이한다.
아래는 필자가 쓴 위 글 가운데 ‘금주가’에 관한 부분이다.
찬송가답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의 <찬송가> 편집에서 탈락된 곡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주가(1917)’이다. 이것은 국민 계몽, 조선 젊은이 선도용 노래였다. 기독교 사회운동 맥락에서 만들어졌다.이 노래의 작시-작곡자 임배세는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감리교인이다. 이 노래는 1923년 청년찬송가, 1931년 신정찬송가,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합동으로 만든 합동찬송가(1949)에 포함되었다가, 1963년에 출간된 개편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뿌리 깊은 조상신 숭배, 악습, 허례허식, 축첩, 음주, 흡연 등의 폐해를 고치려고 청빈, 금연, 금주 등을 강조했다. 일제 치하 기독교 절제 운동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고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동기로 예배, 주일성수, 효도, 순결, 근면, 정직, 술-도박-아편 금지 등을 생활강령으로 제시했다. 금주가는 국민계몽용으로 만들어졌고, 이러한 맥락에서 찬송가에 포함되었다. 마지막 절에는 ‘천부(heavenly father)’와 ‘국가’를 언급한다. 전자는 창조자 하나님이고 후자는 일제(日帝)를 지칭하는지, 일제에 병합된 대한제국(1897-1910)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대한제국'은 황제 고종의 폐위와 함께 사라졌다. '대일본제국'에 병합된 뒤 '우리나라'의 이름은 무엇인가? 조선 국왕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제의 귀족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귀족 신분을 유지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출발하면서 '대한'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취지였다. 1948년 건국되어 출발한 대한민국은 같은 이름을 계승했다. 금주가(1917)의 ‘국가’는 대한제국이 아니다. 금주가가 만들어진 시기를 보아, 상해 임시정부(1919)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한제국은 1910년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국가 기능을 상실했다. 금주가가 언급하는 ‘국가’는 어느 나라인가? 그 시기에 태어나고 살았던 한반도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인들이다. 베를린 올림픽(1936)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는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으로 구성된다.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독립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권 행사를 보장하는 정부가 없었다. 일제시대에도 우리 민족과 동포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대일본제국'이라는 불의한 국가에 속해 있었다. 조선인이 미국이나 중국을 방문하거나 유학을 가려면 '대일본제국'의 여권이 필요했다. 출생신고, 호적신고는 일본어로 했다. 주민등록증 제도가 있었다면, '대일본제국' 국민으로 등록했을 것이다. 울분에 찬 조선인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자기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주가에 등장하는 ‘국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민중의 의식에만 존재하는 나리일 수 있다. 자신들의 ‘국가’가 조선 왕실과 더불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족 감정을 반영한 표현일 수 있다. 민족 구성원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심리적인 나라를 지칭하는 것을 수도 있다. 후렴의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가 이를 암시한다. 1절 2절 3절 4절 후렴 한국교회 최초의 <찬양가>(1894) 제4장은 ‘주 하나님 찬미(讚美主帝)’이다. 이 노랫말은 당시 기독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고백한다. <찬미가>(1905) 제14장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로 시작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애국가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자의 보호를 소망하는 믿음을 담고 있다. 위 두 곡조차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에 발간된 찬송가에서 제외됐다. |
2. 김문수의 역사인식 파동
장관 후보자 김문수는 국회 청문회에서 “일제 시대 조선인 국적이 어디냐?”고 하는 어느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일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국회의원 질문자는 “나와 당신의 조상들이 일본 국민이었다는 말인가?” 하고 대노했다. 김문수의 역사 인식을 ‘친일파’ 시각이라고 몰아붙였다.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국민들이 상당히 많은 듯하다. 연일 김문수 장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멘트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 반일 감정을 가진 국민들은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국 국민이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하다.
일제시대 조선인 국적 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성과가 이토록 부재한가? 그렇지 않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이승일 교수는 2013년 ‘일제시기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연구: 호적제도를 중심으로(『동아시아문화연구』 34, 2000)’를 발표했다. 어느 일본인도 『호적과 국적의 근현대사- 민족·혈통·일본인(明石書店, 2013)』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두 연구자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일제시대 한국인들의 국적은 ‘일본제국’이었다는 것이다.
만주 간도의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에서 벗어나자는 탈적(脫籍) 운동을 전개했다. 왜냐하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간도 조선인들의 거친 항의에도 조선인의 일본 통치를 받는 대한제국의 옛 국적에서 이탈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1899년 국적 취득과 상실에 관한 국적법을 제정했다. 만주 조선인의 탈적 운동은 중국 국적으로의 귀화 운동이기도 했다. 이 내용은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이동진 교수는 만주 조선인의 국적 문제를 다룬 ‘만주국의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식민 사이(『만주연구』 13, 2012)’에 담겨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국제사회에서 만주의 조선인들이 일본 국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로 일본을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국내 조선인-한국인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었는가? 어느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가? 국내 조선인의 국적·국가는 일본제국이었다. 예컨대 1923년 11월 총독부는 ‘사립학교 교원 자격 규정’을 발표했다.
사립학교 교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지원서에 호적등본을 첨부하라고 했다. 외국에 있는 조선인이 취업 등의 사유로 증명서가 필요할 때는 현지 일본영사관에 그것의 발급을 신청했다. 한반도 내에 살고 있거나 태어나는 조선인-한국인은 일제의 한국 ‘민적법’에 따라 호적을 했다. 일제는 국내외에 걸친 호적의 행정체계로 조선인-한국인의 신분을 철저히 관리했다. 당시 호적부는 국적부와 같은 것이었다. 호적과 국적은 별개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일본제국에 병합됐다. 대한제국 땅이었던 한반도는 일본제국 부속 영토가 됐고, 조선인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 국민 곧 차별대우를 받는 식민지의 일본인이 되었다.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보다 열등한 국민으로 취급당했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과 구분되는 이법지역(異法地域)으로 규정해 통치했다. 조선 땅이 일본제국 영토이지만, 일본은 ‘다른 법’을 만들어 한국인을 차별했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한국인은 강탈당한 식민지 국민이었다.
일본 통감부는 1909년부터 민적부(民籍簿)를 제작했다. 1910년 병합 후 민적은 호적으로 바뀌었다. 호적의 구성원은 민법에 의해 ‘가족’으로 규정됐다.
일제가 시작한 호적제와 호주제와 가족 구성원의 조건은 한국인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가 일제 호적에 등록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은 그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했다. 일제는 호적법과 국적법을 나란히 정비해 호적을 한 사람을 식민지 국민으로 간주했다.
일제시대의 한국인-조선인의 국가는 일본제국이었다. 한반도 주민들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들이었고, 그들의 국적은 일본제국이었다. 일제통치 기간 우리 조상들은 일본의 이른바 ‘천황’의 신민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본적지 행정관서는 아직도 일본제국의 조선인 호적 기록을 정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우리 조부나 증조부의 호적은 일본어로 기록돼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하자, 한국인-조선인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라를 잃었다. 국가는 일본에 병합돼 없어졌고, 국민은 일본국에 편입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해 나라를 없애버렸다.
영국은 거대한 대륙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으나 인도 국가를 해체하지 않았고, 다만 식민 통치를 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이와 같지 않았다. 나라 자체를 없애버렸다.
3. 한국신민 전용 일본제국 해외여권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윤치호 선생은 밴더빌트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에모리대학교 캔들러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일본 작위를 받는 망국의 지식인이다.
윤치호는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되기 전인 1905년 이전에 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여권을 가지고 유학을 갔다. 대한제국이 아직 주권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서재필(필립 제이슨)은 조선국 국민의 신분으로, 안창호는 대한제국 국민 신분으로 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권은 국가가 국민에게 발행하는 신분증이다. 1905년 이후 일본이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여권 발급은 중단됐다. 한국인들은 일본제국 여권이나 신분증을 사용했다. 유진설, 백남운, 이광수 등이 일본제국 여권을 가지고 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병합조약 이후, 한국인이 일본을 제외한 외국으로 갈 때는 일본 여권을 받아갔다.
위 사진은 1907년(메이지 40년) 일본제국이 조선인에게 발행한 여권이다. 장로회신학교(평양)가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던 해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그때부터 일본은 대한제국 신민(臣民)에게 이와 같은 여권을 발행했다.
‘한국신민 전용 일본제국 해외여권’ 발행자는 일본제국 통감정2위대훈위후작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다. 박창규(Pak Chang Kiu, 38, 한국 전라도 해남군 화이면 남호리 27통 8호)에게 발급한 것이다. 미국 하와이로 가는 조선인 여행자 여권이다. 왼편은 영어로 자유로운 여행과 안전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이 여권 소지자는 박창규의 후손인 하와이 이민문제연구소 이덕희 선생이다. 우리나라가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일제 통감부가 설치됐을 때, 한국인은 일본국 여권을 가지고 해외에 나갔다.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손기정 선수도 이와 같은 여권을 발부받아 독일에 입국했을 것이 분명하다.
4. “우리는 결코 일본인이 아니다”
역사가 주진오 명예교수(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는 <영남일보>에 ‘우리는 결코 일본인이 아니었다(2024. 8. 23)’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김문수 장관이 제기한 역사 건에 대한 반대 의견을 담았다. 일제 시대 조선인-한국인은 일본 국민이 아니었다는 요지의 글이다.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는 견해를 가진 국민들 입장을 대변하는 글이다.
주진오의 이 글은 뜻밖에도 김문수 장관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한제국이 1910년 강제병합이 되면서 일본의 일부가 되었고, 국민들은 권리와 의무를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주진오는 우리 조상들이 일본국 국민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①조상들이 스스로 일본 국민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②대한민국 정부와 사법부가 ‘한일합병조약’이 원천무효이고 식민지배는 불법 강점이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진오는 국가·국적을 피지배자의 한을 담은 심리적 상태에 근거해 논의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들어선 이후, 정부와 사법부는 ‘한일합병조약’이 원천무효이고, 식민지배는 불법 강점이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김문수의 역사관이 틀렸다고 한다.
주진오는 국적과 국가가 식민지인들의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주민들이 침략자들의 불법성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는 것이 ‘우리는 결코 일본인이 아니었다’는 칼럼 논지이다. 위 글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이 1910년 강제병합이 되면서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법률적으로 한국인들은 일본 국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와 의무를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나라는 빼앗겼지만, 스스로 일본 국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강도 일본’이라 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여권과 증명서를 발급했다. 특히 병합 전에 미국 이민을 떠난 동포들은 공식문서에 국적을 코리아라고 썼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자, 재미 한인들은 ‘한국은 미국의 승리를 위해 싸운다(Korea for Victory with US)’라고 쓴 배지를 달고 다니며 전시 지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 전쟁을 ‘일본 패망의 시초이며, 일본의 패망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미국 국적 없는 한인 1세들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적대적 외국인(enemy alien)’으로 분류해 행정 처리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미국 국적자를 포함하여 재미 일본인들을 강제로 집단수용소에 보냈고, 재산 소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미한족연합회는 미국 정부와 교섭해, 테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한 도형으로 작성한 배지를 옷깃에 달게 해 일본인이 아님을 표시했다. 그들은 한국인이 결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호적 외국인(friendly alien)’으로 분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집단수용소에 간 경우는 없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면서 미국 내 한국인들은 ‘우호적 외국인’의 대우를 받았다. 재미 한인들은 전시 지원 활동을 전개하여 승전 후원금 헌납 또는 국방공채의 구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아울러 캘리포니아 민병대 소속으로 ‘맹호군’이라 부르던 한인경위대(Korean Brigade)를 창설했다. 미군에 자원 입대하는 한인 청년들도 많았다. 안창호의 자녀들을 포함해 800여 명이 참전했다. 그 가운데 전사자도 여러 명이 나왔다. |
5.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기
역사는 상호 비판과 논쟁에 의해 한발짝 더 진실에 다가간다. 성공한 역사보다 실패한 역사가 더 영양가 높은 교훈을 준다. 실패한 역사를 부정하거나 미화하면 영양가 없는 역사만 남는다. ‘성인 열전(hagiography·하기오그라피)’ 식 역사 기록은 올바른 교훈을 주지 못한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돼 있는 지역 관청이나 면사무소에 가서 일제시대 조상들의 호적을 확인해 보라. 출생과 결혼과 사망 연도는 일본 연호, 곧 메이지 몇 년 등으로 기록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편입시켰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잃고 강압적으로 일본국 식민지인 신분을 가져야 했다. 식민지인들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도 못했다.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징적인 조직이었다. 국민에게 여권을 발행하는 정권이 아니었다. 국민의 국가에 대한 3대 의무 곧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도 없었다.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외적의 침략을 막아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실제로 영토를 지배하거나 국민을 통치하는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민 다수는 그러한 임시정부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 같다. 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 조직이지, 온전한 국가 기능을 가진 정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국가’의 존립 여부는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인들이나 그들의 후손이 가지는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헌법 전문이나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지만, 피지배자의 넋두리 같은 전문이나 판결문의 견해는 이 사안에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일제 치하 우리 선조들의 ‘국가’에 대한 논의가 일제의 강제침략과 부당한 통치를 합법화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한일합병조약’이 원천무효이고, 식민 지배는 불법 강점이었다 해도, 일제 통치 기간 우리 조상들은 부당하고 불의한 일제 국가권력 아래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시기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우리나라’ 곧 국민·영토·주권을 가진 실질적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1987, 제8차 개정)>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이 전문이 언급하는 것은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이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다 하여 실제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으로 계승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는 상징성이 있을 뿐, 실제 효력이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국가의 구성 요소인 국민·영토·주권을 갖추지 못했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국가’가 아니었다.
<헌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함은 정신적 연결성을 의미한다. 영토와 국민, 실효적 통치권을 가진 ‘국가’였다거나 그 국가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맥락에서 언급되는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은 일본이 불법적으로 한반도 식민 지배를 했다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어느 나라에 속해 있었는가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기업들이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가한 불법 행위에 대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1940년대 ‘일본 제국’ 지배 아래 강제로 노동에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관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들이 이에 따른 법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한국인은 일제의 강압적 탈취와 통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제는 불법적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시기 우리 조상들은 타의로 일본의 식민지 국민, 2등급 국민으로 취급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라의 실패를 인정하고 불편한 진실을 자인하는 것은 미래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다. ‘불편한 진실’에 당황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제의 식민지 국민으로 강압 통치를 받았음을 인식하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과거의 실패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작동할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눈물과 일제 통치 하 우리 조상들의 슬픔과 비애는 대한민국이 힘을 키워 외적을 막아내지 않으면 나라를 빼앗기고 눈물과 통곡할 수밖에 없다는 값진 교훈이다.
대한민국 ‘건국일’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담은 글 ‘한국인은 어느 나라 국민이었는가?(리포르만다)’는 17세기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건국일의 차이를 논하고, 프랑스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France libre)’가 어떻게 정통성을 인정받았는가 등의 주제를 다룬다. 현대적 의미의 국민국가(nation-state) 구성(영토·국민·주권) 개념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에서 널리 인정받기 시작한 것을 다룬다.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