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 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출애굽기 1:11-12)”.
애굽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불어났습니다. 이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애굽 왕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중노동을 시키면서 학대했고,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을 죽여 그 수를 제한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성취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통치가 아무리 강력해도,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를 수는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죄상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그분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로마서 6장 23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을 의심치 말고, 현 상황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제인 ‘무거운 짐’이란, ‘중량화물’을 다듬은 말이라고 국어사전에서 말해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유대인에게 적용하면 ‘의식과 율법의 무거운 짐에 눌러 고통하는 자’이고, 일반적으로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죄인이나 고통받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얻을 자의 수에 대한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심으로써, 질문 자체가 잘못됐음을 지적하십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구원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대조시켰는데(마 7:13), 여기서는 그러한 대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참되고 선하게 살고자 하면, 많은 어려움이나 고통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한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생명을 얻는 길은 험하고 좁다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는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언급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둘째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를 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박해까지 저항 없이 신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그런 중책을 맡았을 때,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지겠다면서 의기양양하게 나서는 성도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어떤 사람은 무거운 강박관념을 벗고 즐겁게 감당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 대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을 맡기실까?’, ‘왜 다른 사람들은 쉽고 편한 일만 시키실까?’ 하면서 분노의 소리가 커져갈 때 그 짐은 더욱 과중해집니다.
인생의 긴 여정 안에서 주어지는 무거운 짐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없는 삶은 없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과정에서 인간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꼭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된 고난을 우리는 견디든지, 이겨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삶의 승리와 영광을 위한 ‘좁은 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주어진 고난을 피하려 할 때 믿음이 헛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도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고 외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역설한 반면, 사도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바울과 야고보 사도가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바울의 견해를 인정하였습니다(야고보서 2:24).
다만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데 비해, 야고보는 행위가 믿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학자에 따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출발점을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그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했다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배고픔도, 운동도, 아픔도 견뎌낼 준비가 돼 있습니다. 삶의 윤택함과 건강함, 일상의 행복에 따르는 고통과 수고는 기꺼이 감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수고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고백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선택함으로 주어지는 무거운 짐과 고난은 믿음으로 이겨낼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통해 영혼이 건강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편 37:5),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언 16:3)”.
이 두 구절은 신앙인들이 사업장이나 가정에서 액자로 만들어 걸어두곤 합니다. 사업이나 장사를 할 때,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일을 벌려놓고 기도하지 않거나, 열심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실하고 정의로우며 공정하게, 정직하고 부지런히 사명을 감당할 때, 여호와께 의지했던 효과는 엄청날 것입니다. 특히 다윗의 지혜 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여부가 각 사람의 삶과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면서,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죄악이 횡행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죄악에 물든 인간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한다지만, 환경에 따라 손쉽게 변해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은 에덴의 평화를 또 다시 깨는 가련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찬양하지만, 자신을 비워내지 못하는 중압감과 아예 비울 시도조차 하지 않는 어정쩡한 믿음으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좌로나 우로나 마구 치우칩니다. 이는 여호와를 깊게 신뢰하지 못하는 의심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등의 호소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세상의 각종 신들에게 얽매여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러한 모순적 신앙으로 곧 닥쳐올 세상의 종말을 잊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 쾌락을 즐기는 신앙인들에게 주님께서는 경종을 울리십니다. 주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는 신앙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고귀한 선물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방법대로가 아닌, 모든 것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그리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앙인이 참된 믿음의 소유자 아닐까요?
특히 마음의 평화는 비움이 주는 축복이요, 영혼의 향기는 낮춤이 주는 선물입니다. 인격이 갖춰진 사람이란 마음의 양식에 달렸고, 진실한 사람은 말로써 말하지 않으며, 정직한 사람은 매사에 곧음이 보인다고 합니다. 반면 거짓을 일삼는 사람은 세 치 혀로 불신을 낳고, 술수에 능한 사람은 제 무덤을 스스로 파곤 합니다.
이는 여호와께 행사를 맡기는 대신 오롯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가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싶군요! 정직하지 못하고 남을 이간질하며 시기와 중상모략과 아첨으로 국민들을 토탄에 빠트리는 저 어리석은 권력자들에게 아직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건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죄악을 누리는 그들의 종말이 금세 닥쳐올 것임을 예견해 주는 말씀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작품인 지구의 온난화로 날씨는 예전 같지 않고, 인간의 무서운 탐심으로 사계절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어린 시절 삼한사온은 사라지고, 봄과 가을은 짧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폭풍과 광풍이 이어지고, 노아의 대홍수 같은 폭우가 쏟아져 땅을 집어삼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작품을 망치는 탐심의 결과는 막심한 후회와 죽음뿐임을 하루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이면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져 남자들을 감상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가을은 마음의 양식을 쌓는 책을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하나님 나라에 닿을 것도 같은 마음인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혜와 감각만으로 알 수 없는,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믿음의 시작 아닐까요? 히브리서도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내 믿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계절입니다.
내 믿음은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요? 몸은 늙어 아프고,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데, 내 안의 믿음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요? 믿음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데, 혹시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지내는 것은 아닌지요? 따져보니 믿음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선 스스로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하고 기품을 갖추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 차오르는 샘물처럼, 생명을 머금은 어린 잎처럼 늘 새롭고 싱싱하기를 기대합니다. 내 방식을 고집하는 완고함을 넘어, 너그럽게 소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속에 지닌 응어리나 멍에, 무거운 짐을 과감히 내려놓고, 깊은 회개를 통해 지금 즉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시는 모든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