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한복음 11:16)”.
도마는 복음서들 속에서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성격으로 소개됩니다. 즉 우리가 익히 많이 들어 알고 있듯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성격과, 오늘 본문 말씀처럼 적극적 성격 등 두 가지입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얼토당토않은 말은, 주님께 대한 일종의 충성 표시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한복음 20:24-25)”.
여기서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구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부정사가 이중으로 나타나 부정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완고함과,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교만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6-27)”.
도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철저한 회의주의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한 번 뵌 것으로 모든 의혹을 떨쳐 버렸고, 그가 내세운 다른 조건들은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요한복음 11장 속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의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한 내용이 바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됐습니다(요 11:17).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된다고 합니다.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는 말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 영혼이 완전히 떠나지 않고 시체 주위를 떠돌다 다시 육체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흘이 되면 신체 조직이 해체되고 영혼이 결국 떠나가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소생은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이제 인간의 범주가 아니라 하나님께 관여하셔야 가능한 시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례식을 대개 3일간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요?
제자들에게 “죽으러 가자”고 담대하게 말한 도마는 비장한 각오로 행동합니다. 과거 기독교가 열방으로 나아가며 전도의 불길이 치솟았을 때, 유럽에서는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나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죽으러 가겠다”고 앞다퉈 선교지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순교 자체는 아름다운 희생이지만, 죽음을 미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고 탄압하는 자들 때문이지, 죽음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걸핏하면 “순교를 각오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장차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쟁취하려면 조건이 붙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순교의 정신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순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폭력 앞에 신앙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용기 있게 나서는 나단 선지자 같은 신자가 돼야 할 것입니다.
‘순교(殉敎)’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당시, 수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했고, 순교의 자세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이 가능했고, 복음화도 가능했습니다.
그 선교사님들의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많은 목회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했습니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 가운데 공산 집단의이 살해 위협에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셨던 신앙인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오늘날 교회와 나라가 이렇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 주인공인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받고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했다고 알려집니다. 특히 도마는 의심 많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열정과 학문 사랑으로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입니다.
도마는 교회를 세우면서 돌 십자가를 매달려다, 이교도들에 의해 창에 찔려 무참히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심이 많은 성격은 순교하기 힘들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받고 머나먼 인도 땅에서 순교했던, 제자들 중 최후의 인물입니다.
도마의 동상은 상징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면 믿겠다는 듯 손가락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른 한 손 밑에는 그가 순교하기 전 세우고자 했던 돌 십자가가 있습니다. 도마는 먼 이국 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남인도 ‘퐁디 셰리’ 부근 도마의 순교지인 첸나이 근처에 가면, 동상이 더 화려하고 웅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깨집니다. 서양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던 자들이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한 도마의 무덤과 순교지를 만났을 때 그 감정은 어땠을까요?
성도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십자가를 짊어지겠다, 십자가를 가까이 하겠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이웃을 돕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모진 박해 속에 헐벗고 굶주리며 주님과 이웃을 위해 끝까지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의 마음도 생깁니다.
‘순교’라는 말을 쉽게 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순교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고, 추진력도 뒤따라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순교자가 탄생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신앙생활에 돈독하지 않은 신앙인들이 많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까지 주저하지 않고 내놓으며 사명을 감당했던 믿음의 조상들께서 지금 신앙인들을 보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쓰라리실까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이 내 삶에서 유일한 신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 권력과 재물에 마음이 더 가까운지 둘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 사도 도마의 결단력과 판단은 신앙인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제 예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멸시와 천대, 모욕과 고통과 희생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가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숙명일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날마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특히 그런 순교자가 되려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신 순교자 선교사님들을 위해,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곳을 한 번씩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양화진에 계시는 선교사님들의 아름다운 희생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 뿌리내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교를 원하셨습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귀한 자녀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사명을 감당할 성도들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도마처럼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기꺼이 외치며 실천하는 십자가 군병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