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타고난 본능적 사랑(storge), 열정과 육체적인 관계에 기반한 로맨틱한 사랑(eros), 아이들끼리의 장난스러운 사랑 또는 가벼운 연인 사이의 사랑(ludus), 우정(philia)에 기반한 사랑, 성숙하고 인내심과 타협을 바탕으로 한 사랑(pragma), 자기애(philautia), 그리고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agape)”, 이것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종류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성품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실한 이방 종교인들도 아가페 사랑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이라면 기독교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독교 사랑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본질적 사랑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알고 있는 아가페(agape) 사랑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본질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도 베풀고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최근 두 가지 경험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먼 지인이 있습니다. 그분의 남편이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남편은 4개월 전부터 중이염으로 인해 말도 할 수 없고, 듣지도 못해 글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음식을 섭취하는 것조차 힘들어 모든 음식을 죽처럼 만들어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주 아팠습니다. 그래서 홈쇼핑에서 휴대용 믹서기를 구매하고 오트밀과 우유, 단백질을 준비해 전달했습니다. 지인은 감사해하며 울었습니다. 또 한의원에서 약을 주문했습니다. 이런 일회성의 사랑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제는 기념일을 맞아 몇몇 사람을 초대해 함께 식사했습니다. 한 분에게 필요한 시계나 반지, 목걸이가 있냐고 물었더니, 결혼 때 받은 선물도 생활이 어려워 다 팔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고 있던 좋은 시계를 벗어 드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런 사랑은 우정(philia)에 기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필자는 55세 때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남편이 무엇인지, 부모가 무엇인지, 목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결혼하고 부모가 되었으며, 목사가 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철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말씀이 레마로 다가와 지난 55년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아내와 자녀들이 나를 목사로서, 그리고 나를 보고 예수를 믿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인들과 주변 사람들도 나를 보고 예수를 믿고 싶어할까? 역시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모든 생활 습관을 하나씩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것을 고치고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가까이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저분은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라는 칭호를 얻는 것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 1:4:8).
결론
가정과 이웃 세상이 왜 복음화되지 않습니까?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 사랑의 본질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성장하게 하는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필자는 사도행전 2장 47절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을 설교나 세미나에서 자주 강조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주”는 주종관계를 의미하고 “예수”는 구원자입니다. “믿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면 집안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과 믿음은 늘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행함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모태신앙이거나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목사이거나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인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예수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변화된 성령의 열매를 통해 전도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신앙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여기서 말씀하는 ‘열매’도 사랑의 본질이며, ‘아버지의 뜻’도 사랑의 본질입니다.
국제국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