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10월의 지도자: 세종대왕
세계 6,000여 종의 언어 중 창제 연도와 창제자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유일한 언어는 우리나라 한글뿐이다. 그 과학성과 실용성도 세계에서 단연 으뜸이다. 컴퓨터 언어로 써보면 더욱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기발한 언어(문자)를 창제해준 세종대왕을 공부해보자.
조선 제4대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은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과 함께 대왕(大王)의 극존칭이 붙는 임금이다(1397-1450/ 재위 기간 1418년 8월-1450년 2월/ 31년 6개월/ 부인 6명/ 자녀 18남 4녀).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은 재임 중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임금에게만 사후에 후손들이 공경의 뜻을 담아 붙이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건국(1392년) 직후인 1397년 태조 이성계의 5번째 아들이자 제3대 임금인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2년 충녕대군에 봉(封)해졌고 1418년 6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양위로 조선의 제4대 임금에 즉위하게 되었다.
원래 왕위계승 순서는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지만 그가 세자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태종이 심경변화를 일으켰고, 결국은 충녕대군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세종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1년 6개월간 재임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 정치를 중시하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와 사회, 문화와 교육이 전반적으로 기틀을 잡게 되었고, 집현전을 통해 고급 인재들을 양성했고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방대한 편찬 사업도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세종대왕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농업 및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고, 의약과 음악, 법제 정비 등도 괄목할 만한 업적이다.
또 세종대왕은 국토의 확장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세기 당시에는 영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북쪽의 산간 지역 대부분이 주인 없는 땅으로 방치되었는데, 4군 6진으로 통칭되는 북방 지역 영토를 정벌하여 우리나라 국토로 편입시켜 나갔다. 당시 국경선이 현재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세종은 국가 경영 전반에 걸쳐 매우 열정적이었는데, 자신의 건강 관리는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육식을 지나치게 즐김으로써 매 식사 때마다 고기반찬을 취했던 것 같다. 집권 후기에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보필하는 참모들이 훌륭했기에 국정의 기조는 흔들림이 없었다.
특히 세종대왕을 보필한 황희 정승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알려져 있고, 최윤덕(崔潤德), 신개(申槪), 하연(河演) 등의 쟁쟁한 보좌진들이 오늘날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세종은 54세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일에 몰두해 온몸에 종기가 많이 났고, 당뇨와 건습(고관절 염증), 안질에다 임질까지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대식가에 스트레스가 많았고 육식 위주의 식습관과 만성피로가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 듯하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가 1450년 승하하면서 조선의 제5대 임금인 첫째아들 문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1414-1452/ 재위기간 1450년 2월-1452년 5월/ 2년 3개월/ 부인 3명/ 자녀 1남 2녀).
문종은 체구는 컸으나 몸이 쇠약하여 즉위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고, 조선의 6대 임금에 어린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1441-1457/ 재위 기간 1452년 5월-1455년 윤 6월/ 3년 2개월/ 부인 1명, 자녀는 없음). 즉위 당시 단종은 12살의 소년이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세종의 차남이었던 수양대군이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조선의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1417-1468/ 재위 기간 1455년 윤 6월-1468년 9월/ 13년 3개월/ 부인 2명/ 자녀 4남 1녀).
김형태 박사
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