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20)-보카치오
르네상스에 깊은 영향을 끼친 3대 문학가로 단테와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를 꼽는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는 피렌체의 남서쪽 체르탈도(Certald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업차 프랑스에 갔다가 만난 여인에게서 태어났는데, 그것은 보카치오에게 평생 감추고 싶은 이력이었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기에,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믿어 줬고 다정하게 대했다. 아버지는 은행업을 하는 피렌체, 바르디 가문의 나폴리 책임자가 되어 가족과 함께 나폴리의 궁정으로 이주했다. 그때 14살이 된 보카치오도 따라갔다.
당시 나폴리는 프랑스의 앙주 공국의 로베르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에 큰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보카치오는 그곳에서 은행의 견습생으로 일했고, 아버지는 그가 상업적으로 나가기를 기대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나폴리 대학 법과에 입학하였고, 6년 동안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지도한 교수 중에는 단테와 교류가 있던 시인 지노다 피스토이아가 있었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나폴리에서 8년이 되던 1336년 3월 30일 토요일 아침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산로렌조 교회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23살 난 피아메타(Fiammetta)였다.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폴리의 통치자 로베르의 딸인 마리아 아퀴노(Maria Aquino)로 추정되고 있다. 보카치오는 사랑에 빠졌고, 끊임없는 구애를 했다. 이때, 그녀를 향한 수많은 소네트와 노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태리 사람들은 이처럼 사랑에 쉽게 빠지는 감성적 특성이 있다 싶다. 줄리어스 시저가 전쟁을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나폴리에 살던 중 아버지의 은행은 파산했고, 가난하게 된 아버지는 홀아비가 되어 피렌체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그도 피렌체로 갔는데, 그때 그의 명성은 이미 높아졌다. 그리고 1348년 피렌체에 휘몰아친 흑사병으로 아버지와 친지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인구의 2/3가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런 비극적 정황에서 보카치오는 피렌체의 북쪽으로 피신하였고, 그 지역에 경계를 만들어 일반인들의 접근을 봉쇄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그의 대표작이요 독창적인 작품 ‘데카메론’을 썼다. 역병을 피해 숨어든 지역에서 그를 유명하게 한 빛나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 환란이 저에게 유익이 된 셈이다.
나폴리에 비해 피렌체는 작은 도시다. 나폴리에서 오랜 삶을 살았던 보카치오는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앙주 궁정에 자리를 구하고 싶어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저술하여 로렌조에게 헌정함으로 등용되기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1350년에 피렌체를 방문한 존경하던 페트라르카를 만나 교제를 하게 되었다.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보다 9살 연상이었고, 이탈리아의 유명 인사였다. 피렌체를 방문한 그에게 자신의 집을 내주어, 그가 머무는 동안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시해 놓았다. 보카치오는 페트라르카를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로 여겼다.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에게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울 것을 권고하였고, 그는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다.
페트라르카는 한 손에 어거스틴의 책을 잡았고 또 다른 손에는 키케로에 대한 관심을 억제할 수 없었는데, 그 사실을 보카치오에게 언급했고, 그도 충실히 그 가르침을 좇았다. 이런 사상의 흐름이 결국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터전을 만들었고, 근대 무신론의 담론을 개척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고대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고 믿었는데, 여기에도 페트라르카의 영향이 컸다.
또한 1373년에 피렌체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에 부응하여 단테 강연을 시작했다. 그래서 피렌체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도덕적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접근을 제한하려는 지식인 성직자들에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이미 사제로 서품을 받은 자다. 1362년 카르튜지오 수도사는 사제 신분인 보카치오가 문학과 같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다. 장차 종말에 대한 언급도 있었기에, 그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영적 갈등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우고 도서관을 페트라르카에게 팔아버릴 생각까지 하였다. 그런데 스승이요 친구인 페트라르카가 절대로 작품을 파기하지 말고 잘 간수하라는 충고를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저서들은 지금까지 잘 간직되어 있다.
그는 호기심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곁길에 빠진 뒤 결국 캄캄함과 허무의 벽을 만나게 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피렌체의 지식인으로 여러 직책을 맡기도 했다. 1359년에는 로마냐 대사를 했고, 지방자치단체 임원과 부란테 부르크의 루도비코 후작 대사도 했다. 1354년에는 교황 이노첸트 4세의 아비뇽 대사, 1365-67, 아비뇽과 로마에서 우리바노 5세의 대사를 맡아 헌신하기도 했다. 또한 피렌체 지방자치단체의 요구로 단테의 희극을 대중들에게 60회 낭독했는데, 건강이 악화돼 거기서 멈춰야 했다.
그는 스승이자 멘토인 페트라르카가 죽은 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 최초의 산문가요, 시인이요, 창작가인 그는 고향 체르탈도에서 여러 명의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인문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