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세종대왕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세종대왕(1397-1450/ 재위 기간 31년 6개월/ 1418.8- 1450.2)에 대하여 알아본다. 2024년은 세종 즉위 606년째이다.
세종은 조선 건국 5년 뒤인 1397년 4월 10일(양력 5. 15)에 한양 준수방(현 서울 통인동 세종마을)에서 이방원(태종)과 민씨 부인(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출생해 22세 때(1418. 6. 3) 양녕대군(이제) 대신 왕세자가 되고, 1418년 8월 8일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났다. 1418년 8월 10일(양력 9.9) 근정전에서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한 후 8월 11일 즉위 교서를 발표하고, 이어 31년 6개월간 임금 자리에 있었다. 그 업적을 요약해 본다.
서양에선 사람 중심의 세상을 연 문화와 과학의 꿈인 르네상스가 14세기 후반부터 20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런데 세종은 재위 31년 6개월간 서양의 르네상스에 비견될 만한 업적을 쌓았다. 일본 학자들의 자료(이토오 준타로 外/ 과학사 기술 사전(1903))에 의하면, 15세기 세계의 주요 과학기술 업적이 조선 29건, 명(明)나라 5건, 일본(日本) 0건, 동아시아 그 외 국가 28건으로 되어 있다. 당시 중국(明)이나 일본에 비해 조선이 월등히 우수한 과학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은 이 외에도 ①民本정치(백성 중심)를 시행했다. 관노비의 남편까지 아내의 출산휴가(1개월)를 누리게 해 주었다. 당시 노비 제도에선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②한글 창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공적이다. 1443년(세종 25년) 창제한 후 실험과 정비를 거쳐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했다. 현재 전 세계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 중 단연 첫째로 인정받고 있는 언어다.
③집현전(Think tank) 학자들의 토론과 연구를 활용해 융·복합적이고 백성 중심의 찬란한 꽃, 토론 정치를 운영했다. 그리고 세종 자신이 음악에도 관심이 깊고 조예도 높아 ‘여민가(與民歌)’와 ‘정대업(定大業)’ 및 ‘보태평(保太平)’이란 노래도 지었다. 세종실록을 통해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거나 다른 경연(세미나)을 진행할 때 세종이 활용한 5가지 대화법이 전해오고 있다.
①이위하여(以爲何如: “어찌하면 좋겠는가?”) 법을 통해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통해 말문 열기” 토의법을 사용했다. 요즘의 ‘아이스 브레이킹(Ice-breaking)’ 기법이다.
②경언심가(卿言甚嘉: “그대의 말이 매우 좋구나”) 법을 통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사용했다.
③자부지자(自不知子: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법을 이용해 “겸손한 의견 듣기”를 자주 했다.
④소술선지(紹述先志: “이전 의견을 검토하자”) 법을 통해 “생각과 사람을 연결해 보기”도 활용했다.
⑤성심적솔(誠心迪率: “진심을 다해 솔선수범하기”)로 “책임지고 대화 내용을 실행”에 올렸다.
이런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활용해 집단 사고와 균형 잡힌 결론을 도출해내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 언로(言路)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세종은 정치적 이유로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정적까지도 포용해 성과를 내는 정치(成效之政)를 폈다. 세종은 귀를 열어 경청했고 입을 열어 신하의 의견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어 함께 실천하는 민본 정치로 큰 성과를 만들었다(정조는 신하를 믿지 못하고 가르치려 했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국내 유수의 학자, 선비들을 모아 그들을 싱크탱크(Think-tank)로 활용해 심도 있는 정책 개발을 해냈다. 전문가들과 충직한 신하들(명재상 황희, 맹사성, 과학혁명 주창자 장영실, 음악의 귀재 박연,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6진을 개척한 김종서)을 충분히 활용해 아마추어 정치가 아닌 탁월한 수준의 프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자녀도 18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중에 5대(문종)와 7대(세조) 왕이 나왔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