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22)-진리의 횃불을 든 사보나롤라②
메디치 정부의 통치자가 사라져 버렸다. 통치자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프랑스가 피렌체를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외로 도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참에 군중은 사보나롤라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추천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피렌체를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은 프랑스 군대가 웬일인지 스스로 물러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람 사보나롤라의 영성 때문이라고 믿었고, 사보나롤라를 더욱 신임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사보나롤라가 담대히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껏 금기로 여기던 교황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절대무오를 주장하는 교황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일개 수도사의 신분으로 말이다. 당시 교황의 잘못을 아는 지식인은 많으나, 사보나롤라처럼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고, 부패한 권력자를 향해 잘못을 지적하는 자는 소수다. 항상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장, 그것이 세상의 민낯이지만, 권력자를 지적하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황청이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페스카라와 안코나, 그리고 리미니와 피렌체를 경계로 하는 중부의 동쪽 지역이었다. 로마의 남부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통치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1452-1498)는 가장 부패한 교황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부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뒀고, 그 외에도 여러 자녀가 있었다. 그의 권모술수는 세상의 왕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추기경 시절에 여러 교황의 성직록(바티칸 재정 담당)을 맡아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을 이용하여 교황에 올랐다.
고로 희대의 부패한 교황과 탁월한 경건주의자의 대립은 당연히 불꽃튀는 대결이 불가피했다. 어쩌면 영과 육의 대결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협상의 달인이었던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타협의 손길을 내밀었다. 큰돈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는 추기경에 제수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수용하면 가문의 영광이요, 평생을 명예와 호의호식할 수 있는 달콤한 기회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그 제안을 즉각 거절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빨간 모자가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죽음, 곧 주님을 위해 나의 몸을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주께서 흘리신 붉은 피로 물든 거룩한 모자를 쓰고 싶습니다.”
그 당시 권력층은 어린 자녀들에게 추기경 자리를 얻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10대에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일은 귀족 가문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도 13살에 추기경이 됐다. 그를 위해 현재 가치로 8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급했다고 한다. 당시 성직매매가 바티칸의 큰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어떤 교황은 교황청의 돈이 고갈되면 추기경들의 수를 대폭 늘렸다. 추기경은 출세의 지름길이었기에, 귀족 가문들은 누구나 이를 원했다. 사보나롤라는 이런 일에 대해 잘못됐다고 타는 목마름으로 외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를 반대하는 무리가 일어났다. 그의 설교에 감동하는 것은 순간으로 가능하지만, 순종하는 삶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개혁자의 길을 따르기보다 편안함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넘쳐난다. 사보나롤라를 따르던 피렌체시민들의 변심이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교황은 시민들이 사보나롤라를 멀리하도록 사주했다. 고로 그의 인기는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교황은 이런 움직임을 주시하고, 피렌체 수도사들을 동원하여 사보나롤라를 여러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도록 사주했다. 또한 사보나롤라가 더 이상 피렌체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교황은 1497년 그를 이단자로 파문하고 화형에 처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에 거부하는 자는 책벌하겠다고 선포했다. 사보나롤라는 이제 하루아침에 존경받던 자에서 화형당해야 할 자로 전락했다.
시뇨레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는 그의 화형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는 오랏줄에 묶여 광장으로 끌려왔고, 주교는 그가 입고 있던 수사복을 벗기며 공포했다(옷을 벗겼다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교회)와 승리적 교회(천상교회)에서 분리하노라!” 그때 사보나롤라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전투적 교회를 떠나지만, 승리적 교회에서 분리할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 후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화형장에 세워진 기둥에 높이 달렸다. 그리고 그의 몸은 곧 맹렬한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때는 1498년 5월 23일이었다. 어제까지도 그를 열광했던 수많은 피렌체시민들은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해 보라! 다니엘처럼 능력을 행해 보라!”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처럼, 그는 일찍이 피렌체에서 순교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계속, 이곳에서 설교하게 된 것을 감사드렸다.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날 위해 고통당하신 주님이신데, 그 주님을 위해 나도 기꺼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후 그의 뼈는 추려져서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논 강에 뿌려졌다. 절대로 그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아르논 강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보나롤라의 뼛가루를 황송한 마음으로 받았다. 부활의 날까지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교황 마르티누스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뼈를 불사르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재를 강에 뿌리도록 했는데,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풀러는 위클리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위클리프의 뼈를 불살라 시내의 급류에 던져 버렸다. 그들은 그 뿌린 잿가루를 아본 강으로, 아본 강은 세버른 강으로, 세버른 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다시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재가 된 그의 뼈는 이제 온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다.”
사보나롤라의 잿가루도 역시 아르논 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흘러갔고, 더 나아가 온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표시해 둔, 사보나롤라를 화형시킨 자리! 그 맹렬한 화염이 사보나롤라를 휘감을 때, 그를 바라보는 군중의 복수심에 불타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느끼게 될 것 같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존경하고 탄성을 질렀던 군중이었다. 이런 것이 세상의 흐름이고, 군중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그가 화형을 당하고 19년 후에 하나님은 독일에서 마틴 루터를 일으키셨다. 그래서 개혁의 배턴을 이어받게 하셨다.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자리,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람은 조금 빨리 떠나거나 조금 더 머물 뿐이다. 마흔여섯 살에 진리를 목이 터지라 외치다 떠난 바로 그 자리! 의인의 피를 흩뿌린 그 땅은 침묵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뒤를 이어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길을 가고 있는가!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