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마가복음 12:33-34)”.
이제 가을도 끝자락에 와 있음을 실감합니다. 엄동설한이 가까이 오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가을을 붙잡아 보려 안간힘을 써 봅니다. 그래도 산에는 불타오르는 단풍 잔치에 마음까지 푸욱 담겨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가을의 노래 속에 정다운 저녁 노을과 함께 타오르는 석양의 찬란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의 사랑을 화폭에 담아 살포시 오색의 단풍잎을 안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29절)”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0절)”고 하십니다. 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절)”고 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고갈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보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보고 듣는 잠깐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고, 기도를 하지만 순전히 자기 말만 하고 끝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려면, 이웃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충분히 검토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떠드는 입술은 자기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자신에게 피해나 손해, 조롱과 모욕을 주지 않을 때까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생겨나기 전까지일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는 까닭은, 세상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를 끊어내지 못함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며, 세상과 주님을 함께 섬기는 양다리를 걸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잠시의 환락을 끊어내지 않으면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인 불구자가 될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사랑 없는 빈 수레와 같은 요란한 삶 속에서 허망하게 빈껍데기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멀리 하고,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데서 기쁨을 얻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9절의 “유일한 주”는 ‘하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하드’로, ‘홀로, 나만의’가 아니라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고”란, 사랑과 정서가 깃드는 기관입니다. ‘다하고’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생활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고,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생명 혹은 인격, 죽음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민 5:2) ‘힘’은 세력이나 정신력과 같이 인간이 소유한 모든 힘을 말합니다. 하지만 구태여 이 3가지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3가지가 모두 한 인간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이 나옵니다. 제물 전체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자세를 나타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나으니이다”는 어떻습니까? 오늘 대답하는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34절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는 말씀은 서기관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격려와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작금의 신앙인들은 오늘의 이 서기관처럼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요건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신앙인들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말이나 행동이 분명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즉 양다리를 걸쳐 세상 놀이도 하고 교회도 나가면서 천국도 차지하고 싶은 이중적 신앙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이 말씀은 비장한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일종의 취미나 문화적인 소산처럼 여기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책망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앙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외적 신앙 행위는 남들 보기에 믿음이 있게 보이지만 그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없는 자이며, 신앙인들은 비신앙인들과 결코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신앙생활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제발 정신을 주님께로 한데 모아 신앙생활에 전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음을 깨닫고, 신앙인들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