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랑 그리고 감사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18:1)”.
황금 들녘에는 농부들이 그동안 땀 흘려 고생했던 결실을 맺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흐르는 땀방울과 함께 입가엔 미소로 연신 즐거워하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오늘 주제는 ‘사랑 그리고 감사’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 이상 아름다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늘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살아간다면, 분쟁이나 전쟁, 죄를 더 이상 생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인간들의 탐욕에서 오는 거짓 사랑과 감사로 인하여 화평과 평화가 없고 늘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내 이익을 위해 서로를 견제하며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범사’란, 국어사전에 따르면 ‘갖가지의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자 요구입니다. ‘감사(感謝)’란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라는 의미입니다.
곧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잘 아시듯 17세기 신대륙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620년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플리머스(plymouth)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특히 처음 맞이한 겨울에는 극심한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다음 해인 1621년 봄 청교도들은 원주민인 왐파노아그 부족의 도움으로 농사를 지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청교도들과 원주민은 함께 모여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이 추수감사절을 계기로 해마다 기념일을 지켰다고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첫 행사로는 사냥한 칠면조와 옥수수, 호박, 각종 야생 열매 등이 식탁에 오르며,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감사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 매년 감사의 마음을 기리는 전통이 어어지면서,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예배는 추수감사절의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은 1년 동안의 수확물과 추수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개신교(성공회 포함) 기념일로, 미국에선 1년 중 최대의 명절이 됐습니다. 부활절, 크리스마스와 함께 전 세계 교회에서 지키는 3대 명절 중 하나이고,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지정해 연휴를 보내는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입니다.
오늘 말씀 중 “항상 기뻐하라”는 단지 인간의 감정적 기쁨만을 뜻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갖는 성령의 기쁨을 포함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성령 충만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짧고 딱딱 끊어지지만, 이 명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를 보여줍니다. 이 명령은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어느 집단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 체험과 하나님이 미래에 성취하실 일에 대한 소망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기뻐할 근거가 충분하며, 이러한 기쁨을 겉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명령이 감사하라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한다는 의미의 기도일 것입니다. 계속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고, 정기적으로 자주 기도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의 공통점은 언제 어디서나 그래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이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바울이 덧붙여 말하듯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이 즐거워하고, 늘 기도 생활을 하며, 감사하기를 원하시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조금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거나 좋지 못한 환경이 찾아오면, 평소 그렇게 노래 부르듯 감사하던 순간들도 자취를 감춰버리기 마련입니다. 대신 ‘내게만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겁니까?’ 하면서 원망의 한숨으로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구약의 ‘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으로부터 재앙을 당한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지만,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욥기 2:9-10)”,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이란 히브리어 ‘나발’은 단순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타락할 때 야기되는 지식의 악용을 가리킵니다. 즉 타락해 하나님을 조롱하는 강퍅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앙을 당해도 굴하지 않는 욥의 순전한 신앙이 입증되자, 사탄은 2차 시험을 하게 됩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났고, 아내조차 그를 떠났으며, 자식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욥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 변하지 말고, 욥처럼 하나님에 대해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감사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감동의 물결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욥의 사랑과 감사를 철저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감사가 나올 수 없고, 감사가 없는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의 삶 속에 감사가 늘 자리하고 있다면,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사랑을 해도 절로 감사가 넘쳐 흐르게 됨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연례행사로 감사절을 지키는 곳에는 사랑과 감사가 없고, 감사와 사랑이 없는 곳에는 사탄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주둔해 우리 믿음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늘 이웃을 위해 베풀고 나누는 삶으로 전환해 하늘에 소망을 묻고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믿음의 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필자는 사랑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친구 두 분을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두 분 모두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동창생으로, 한 분은 교직 생활을 오래 하시고 정년퇴임하여 이웃을 위해 틈틈이 시간 내어 색스폰 연주로 지금까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 역시 오래 교직 생활을 한 분으로 정년퇴임 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날 벼락같은 파킨슨병으로 지금까지 병마와 싸우며 고된 신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양사가 잠시 보살피지만 나머지 시간은 거의 부인 병 간호와 수발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이지만, 불평불만은 고사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보살피는 그 모습은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다른 친구는 치매로 홀로 사는 처형을 집 근처로 이사하게 하여 아침, 점심, 저녁까지 일일이 챙겨주고 다른 모든 일들을 대신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즘 보기 드문 사랑과 감사를 실천하는 모범적인 친구인지라,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 친구와 부인은 언니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합니다. 다른 형제도 많이 있지만, 솔선해 홀로 사는 처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사랑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충실한 자녀의 모습 아닐까요?
곁에서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파킨슨병이나 치매는 불치병에 가까운 것으로 수발을 들며 간호하는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친구는 나이 들어 내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나 하는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내색 없이 열과 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어 참으로 놀랍고,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 봅니다.
이 두 친구는 평소에도 겸손하고 이웃의 아픔을 방관하지 않으며, 상대방과의 대화도 참을성 있게 끝까지 경청하며, 이웃과 친구들과의 소통에서도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탁월한 인품의 소유자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이웃에 좋은 이미지를 주는 모범적인 신앙인입니다.
필자는 매일 같이 이 두 친구의 어려움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 두 친구의 어려움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안수하셔서 회복되게 하여 주시고, 이전에 누리던 사랑과 감사를 누리는 가정으로 다시 세워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감사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감사를 낳는다’는 마음으로 철저한 사랑과 감사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감사의 정신을 마음으로 늘 묵상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신앙인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