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성찰 7] 비판의 후유증
비판 싫어하면서, 비판 즐겨해
거듭난 성도들, 비판 못 버리나
사탄의 열매, 암의 뿌리 될 뿐
당사자 없을 땐 이야기 말아야
4. 비판의 후유증
생각 없이 그저 재미 삼아 비판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때로 비판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쉽게 입으로 뱉어낸 비판들이 실제로는 한 사람의 영혼에 비수가 되어 상처를 준다. 이렇게 상처 난 영혼은 쉽게 아물지 못하고 용서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수납하지 못하고 사는 불행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지 않지만, 상처를 받았다 해도 빨리 상처를 아물게 하는 용서라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판이라는 무기는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낼만큼 무서운 사단의 무기다. 비판은 한 사람의 영혼을 지옥의 문으로 끌고 간다.
나아가 비판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인간 사회를 의문으로 끌고 간다. 오랫동안 우정으로 다져진 두 친구가 어느 날 비판에 직면하자, 평생 원수가 되어 버린다. 친구가 없는 자리에서 무심코 그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한 것이 친구의 귀에 들렸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30년 지기의 단단했던 우정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비판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만 해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조직이건 한번 비판이 행해지면 그 조직의 기반은 금이 가고 만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금이 간 부분을 메우고 땜질하려 해도 사후약방문이 된다.
어떤 회사는 두 사람의 이사가 골프를 함께 치다 다른 이사의 사적 생활에 대해 험담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이사회에서 정식으로 안건이 되어 다루어졌는데 이사들끼리 편이 나뉘어 옥신각신하다 결국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졌고, 마침내 그 회사는 1년 만에 부도를 맞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비판은 덩치 큰 회사도 무너뜨린다. 한 번 무너지면 일어서기 쉽지 않다. 쏟아진 물을 다시 컵에 담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모든 사람은 비판에 능한 사람을 싫어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비판을 싫어하면서, 정작 자기는 비판을 즐겨 한다. 타락한 인간에게 비판은 마치 자식과 같은 존재다. 모든 사람이 비판을 싫어한다면서 자기는 비판을 즐기는 것과, 모든 사람이 자식 자랑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자식 자랑에 열을 내는 것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자식이라는 시험 문제를 풀어야 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간다는 의미다. 자식으로만 살면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 자식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다 보면 어느 새 부모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부부의 결혼과 자연출생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마음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얻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부모 된 자에게 가르치신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짊어지고 간 아브라함을 통해 자식에 대한 세상적인 소유욕과 애정의 능선을 넘어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자식을 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도 가르치셨다.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나의 자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식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자녀들과 다른 존재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키우고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난 자들이다. 믿음으로 났기에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 부모의 가치관과 계획과 재물과 능력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능력으로 키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관계만이 영원히 존속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불행히 사람은 거듭남을 체험하고서도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 한나는 서원대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친 여인이지만, 오늘의 여인들은 한나가 되지 못한다.
오늘 부모들은 자식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지나치게 애지중지한다. 자식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우상숭배라도 하듯 자식을 대한다. 내 자식이 최고이고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친다. 이런 부모가 최고의 부모이고 사회적으로도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비판이라는 자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비판의 혀를 끊지 못하고 있다. 비판이라는 달고 맛있는 사탄의 열매를 즐겨 먹는다. 그러나 비판의 열매는 결국 암의 뿌리가 될 것이다. 비판을 즐겨 먹는 자는 몸 안에 암이라는 독소를 쌓는 것이다. 암이라는 존재는 위태로운 지경이 되기까지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비판은 인스턴트 식품이다. 먹기에 쉽고 간편한 것이지만 결국 건강을 해치는 식품이다.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를 살피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요 교훈이다. 자기를 살피는 자가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자기를 돌아보고 살피는 것을 ‘성찰’이라 한다.
이것을 계기로 ‘그리스도인의 성찰’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깨달아야 할 때이다. 자기를 살피는 자는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않는다. 故 박윤선 박사는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8)”.
최더함 목사
Th. D., 바로善개혁교회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
마스터스 개혁파총회 임시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