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부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1-34)”.
‘어부바’란 어린아이가 업어달라고 하거나 어린아이에게 업히라고 할 때 하는 말입니다. 손목으로 양쪽 다리를 감싸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의 목을 감싸 목마처럼 타는 자세도 ‘어부바’라고 합니다.
현 시대에는 ‘어부바’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기를 돌볼 때 전에는 맨손으로 아기를 안거나 뒤로 업고 이불 같은 포대기로 앞뒤를 둘러 싸맸습니다. 재우거나 자지러지게 울 때, 엄마가 뒤로 아기를 업으면 아기는 곤히 잠들곤 했습니다. 엄마의 품과 어깨는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잠자리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가 아기를 보행기에 태우거나 유모차 등 첨단 장비 등을 이용함으로써, 엄마들은 ‘어부바’라고 하기보다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첨단 놀이기구를 이용해 ‘어부바’ 대신 아기를 돌보고 있습니다.
특히 안타까운 모습이 있다면, 아기를 태워야 할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고 다니는 보자기에 개를 안고 다니는 모습 역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갓난아기를 부르거나 갓난아기가 엄마 품으로 걸어올 때, 아장아장 걸어오면서 빙긋이 웃으면 참으로 귀엽고 예쁩니다. 엄마는 다가오는 아기를 잽싸게 옆구리로 옮겨 ‘어부바’ 포대기 속으로 넣은 뒤, 등에 태우고 포대기 끈으로 허리를 한 바퀴를 돌리고는 아랫배 아래로 끈을 서로 연결한 후, 손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 아기는 금세 사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엄마 품으로 가기 위해 두 팔을 벌려 뒤뚱거리며 안기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그 품은 참으로 평온하고 평화스럽고 포근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품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스런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 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31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반드시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도 보너스로 받게 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구할 것은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나라가 실현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보시고 올바르다 하실 만한 일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에 모든 정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족하므로, 내일 염려를 미리 앞당겨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동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며 수고를 다할 뿐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동물이나 식물까지 돌보시며, 이 세상을 넘어 우주전체까지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신 사람을 보살피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식과 의복보다 더 중요한 생명과 몸을 주셨는데, 성도들이 필요한 음식과 의복 또한 주시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당연히 주실 것을 믿음으로써, 양식과 의복에 마음이 빼앗겨 그것에만 몰두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 귀한 가치들, 곧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신앙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메고 있는 죄의 짐들을 내려놓고,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었던 탐심과 교만, 그리고 음란과 자랑을 내려놓아야 주님께서 부르시는 ‘어부바’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첨단 장비들로 편하게만 살려 한다면, 세속의 향기를 찾아 맴도는 탕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기는 ‘어부바’ 음성만 들으면 모든 초점이 엄마의 품을 향한 채 아장아장 넘어질 듯 다가옵니다. 혹 넘어지거나 위험해 처할 때면 엄마의 손길이 거침없이 다가갑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어린아이처럼 세상에 물든 수많은 것들을 쏟아버리고, 오늘 ‘어부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기처럼 주님 품을 향해 달려가시길 소망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율법학자들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칫집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엄중히 단죄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에게 주님께서는 “헌금함에 넣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 또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 같이 교만하고 자기 자랑을 하며 탐심과 자신의 우월주의에 빠져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 권력과 부귀영화에 심취해 엄중한 최후를 맞이하는 쓰라린 비운의 아픔을 그들은 곧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어부바’ 소리를 경청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주님만을 모시지 않고 지금까지 가득 채웠던 세상 근심과 탐욕, 권력과 자랑 등 모든 것을 비우기 전에는 주님을 결단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비우기 전에는 세상 사람 모두를 불신하고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주님을 내 안에 모신 후에야 세상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비우고 주님께서 ‘어부바’ 하고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방향을 전환할 때, 비로소 ‘어부바’가 주는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