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칼럼] 인간의 존엄성
늦게 교회에서 알게 된 친구 집사님이 계신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는 집사님의 모습이 늘 귀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어머님의 거동이 불편해지고 음식을 잘 드시지 않으면서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는지 기도 제목을 부탁했다. 그 중 하나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집사님의 기도처럼 노모 권사님은 곡기를 끊으시고 음료 형태의 영양분을 조금씩만 드시면서도 사람을 알아보셨고, 지난 주에 만난 필자에게는 “예쁘다”고까지 이야기해 주셨다. 육체가 쇠잔해지고 점점 얼굴 표정은 없어지지만, 그래도 곱게 인생 말년을 보내고 계시는 권사님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집사님의 기도 제목을 들으며 집사님이 말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아마 집사님이 이야기한 ‘인간의 존엄성’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사람을 알아보고, 치매 환자처럼 비참한 모습이나 뇌사처럼 연명치료만 하는 모습이 아니길 바란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죽기 전까지 자유와 선택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유엔에서 1948년 12월 10일 발표한 ‘세계인권선언’에서는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고 전 세계가 합의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은 비교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성이 더 발달했거나 생각이 깊어서 또는 더 탁월하기 때문에 또는 계층 구조에서 더 놓은 곳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인간은 존엄성과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데 의의를 두게 됐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세계대전과 같은 아픔이 없도록 존엄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선포하며, 법 앞에서 모두 차별 없이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 세계가 같은 목소리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현실 사회에서 우리는 존엄성과 거리가 먼 경험들을 하게 된다. 겉으로 잘 포장된 선진화된 호주에 살면서 이민자로, 원주민으로, 여성으로, 장애인으로 살아갈 때 차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차별을 많이 경험한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상사에게 아부를 잘 떨어야 승진을 할 수 있다거나, 좋은 일을 할 때조차 정치적 힘을 빌려야 훨씬 잘 된다거나, 학교에서 선생님께 사랑받을 때 훨씬 더 유리하다거나, 병원에서는 불의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거나, 경험이 많고 많이 가진 사람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는 등, 어느 사회든 적용되는 권력에 의한 차별대우의 모습이다.
이런 차별이나 불의를 사회에서 경험하면 화를 내면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 개인의 삶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음을 볼 때, 인간들의 연약함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부패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개인의 작은 삶에서 가족이나 이웃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어떤 분이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꾸려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고, 만약 자신의 삶부터 바꾸려 했다면, 어쩌면 세상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일상에서 위기를 경험하는 인간은 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부분에서 연약한 것 같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인간의 존엄성을 놓아버리는 결정을 하니 말이다. 원치 않았던 아이를 혼전임신했을 때, 자신의 아이가 존엄성을 가진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모르고 쉽게 낙태를 하거나 길에 아이를 유기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넷플릭스에서 인기 있던 드라마 <마이 데몬>에서는 인간이 존엄성의 주요 부분인 ‘도덕성’을 물질적 부요 및 성공과 쉽게 바꾸는 일들을 조명한다. 목숨과 성공을 바꿔 버리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의 장기를 팔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마음의 동기를 이용해 동남아 소녀들을 돈을 받고 사창가에 팔아버리면서 중독자로 만드는 일 등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대표적인 일들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죽음이 결정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끝까지 그 존엄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보면, 생존의 위기가 매일 같이 찾아오고 배고픔과 질병과 생존 투쟁이 있는 그곳에서도 아픈 사람을 돌보며 옆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힘든 일 중에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며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나보다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숭고한 인간 존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치매나 기타 질병 등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치매나 심각한 질병 자체가 인간 존엄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질병이나 아픔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이다. 그 반응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기도 하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경에는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지키는 것이며, 세계인권선언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김훈 목사 Rev Dr. HUN KIM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