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는 저소득층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회적 최하위 계층을 의미합니다. 흙수저는 부모나 윗세대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그리고 유전적 배경을 강조하며, 저소득층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반면 ‘금수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富)에 의해 사회적 계급이 나뉜다는 자조적인 표현입니다. 금수저는 “좋은 환경과 조건을 타고났다”는 뜻으로, 흔히 금수저와 흙수저로 사회를 구분할 때 사용됩니다. 즉,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나 금수저가 정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대다수 사람은 흙수저로 태어납니다. 그런데도 성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반면 금수저로 태어나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듣기 어렵습니다. 옛말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로,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흙수저에게는 이러한 전화위복의 기회가 있지만, 금수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금수저를 선망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성경에서는 금수저와 흙수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금수저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결국 허무한 인생에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8)"란 말을 전도서에서 23번씩이나 언급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금수저는 왕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필자는 아내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는 검은 머리로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흰머리가 됩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금수저이며, 그것이 행복일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나사로는 흙수저이고, 부자는 금수저일까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나사로는 분명히 흙수저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인생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지만 그 기간은 수고와 슬픔뿐이며,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라고 말합니다. 필자도 고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벌써 7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요즈음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나사로와 부자도 이런 세월을 살았습니다. 세상에서는 흙수저였던 나사로가 죽음 이후에는 금수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 동안 나사로는 매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 했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 데를 핥았다(눅 16:2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부자는 세상에 살 동안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다(누가복음 16:19)”고 합니다. 그러나 금수저로 살았던 부자의 인생도 끝이 있었습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누가복음 16:24)”라고 부자가 고백합니다. 결국 금수저로 살았던 인생도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세상 철학은 운명론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얼굴에 12궁과 손바닥에 5가지 운명이 있다고 합니다. 12가지 띠와 난 시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운명론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운명을 바꿔가면서 살아갑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비록 이 땅에서 흙수저로 살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면, 나사로처럼 영원한 금수저의 복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 흙수저를 금수저(다이아몬드)로 바꾸는 종교입니다(신명기 28장).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인간의 본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흙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운명을 바꿉니다. 세상 철학은 운명론을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거부하고 잘못된 운명도 바꿔 나갑니다. 기독교는 금수저로 태어나고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 19:24)”
결론
금수저가 되고 싶습니까? 지금 즉시 그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는 말씀은 죄의 유전자가 의(義)의 유전자로 바뀌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흑암(사단, 마귀, 용, 뱀, 귀신)의 지배를 받던 옛사람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하늘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금수저입니다. 이 선택은 단 한 번만 하면 영원히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지금 즉시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죗값을 치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 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나를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접 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란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당신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이 땅에 살 동안 신앙생활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교회와 훌륭한 복음적인 목사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과 영원한 천국에서 복을 받는 길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우리도 의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