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17-18)”.
이제 한 해도 거의 막바지가 되었습니다.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아쉬움은 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해마다 자선냄비 소리는 댕그랑 댕그랑, 12월의 음성이 여기저기 메아리가 되어 차가운 바람을 뚫고 울려 퍼집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사랑이 요구되는 연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날 새벽,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요 18:15-18, 25-27).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깊은 회개와 겸손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권위를 회복시키시고, 당신을 따르는 성도들의 지도자로 그를 세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대답에서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 내어 맡깁니다.
유대인들은 걸을 때나 달릴 때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겉옷을 허리띠로 둘렀습니다. “스스로 띠 띠고”에서 ‘띠’란 자유를 뜻합니다. 베드로는 대체로 젊었을 때 마음에 내키는 대로 모든 일을 분별없이 행동했으므로, 늙어 어느 때가 이르면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손이 묶여 형 집행 장소로 끌려갈 것입니다.
더구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한글 개역성경 난외주에 있듯 헬라어 원문에는 ‘이 사람들보다’가 아니라 ‘이것들보다’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느냐?” 또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느냐?” 또는 “네가 이것들(세상살이들)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느냐?” 등입니다. 어쨌든 주님의 이 질문은,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가슴은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세 차례 질문 중 두 번째 질문은 ‘아가페’의 사랑인 데 반해, 베드로는 형제애와 같은 뜨거운 ‘필리아’의 사랑으로 답합니다. 하지만 요한의 문장 구사 기법으로 볼 때, 여기에서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됐다 해서 의미상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원래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이뤄졌음을 상기해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또 “주여 그러하외다”라는 베드로의 답변은 예수님의 질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18-19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신 후 하신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진실로 진실로”라는 엄숙한 표현에 의해 이끌리고 있음에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팔을 벌리리니”란 초대교회에서 십자가 죽음을 가리켰으리라 추측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1-3)”.
바울은 당시 교인들이 귀하게 여기던 방언·예언·믿음·구제의 은사를 예로 들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짧은 본문에 ‘사랑이 없으면’ 표현이 세 번 반복해 등장합니다. 그만큼 사랑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이란 방언을 가르키는 말로, 방언에 관한 진술을 최대한으로 강조하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에서의 사랑은 방언을 비롯한 각종 은사들을 의미 있고 유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방언이나 예언이나 능력 등의 위대한 은사들이라도, 사랑을 따라 시행되지 않으면 무의미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로,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는 친구 간 사랑인 ‘필리아(φιλία)’, 이성 간 사랑인 ‘에로스(ἐρως)’,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인 ‘스톨게(στρογή)’와 구별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흔히 ‘사랑’이라는 말을 허다하게 사용합니다. 특히 사랑에는 4가지가 있지만, 그 중 ‘아가페’를 최고라고 표현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하신 사랑이므로, 인간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이성 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는 부모와 자식 간 사랑마저 식어버려 불효가 판을 칩니다. 십계명 다섯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을 현 시대는 불순종하고, ‘에로스’ 사랑인 남녀 간 사랑에만 치우치다 점점 타락해지고 있습니다. 또 다시 노아의 홍수 시대를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시대입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입으로만 꽹과리를 치다 교회다운 가치를 상실해, 어디로 가야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관계나 사람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과 행복을 베푸는 일이라 이릅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나야 한다는데, 그저 건성으로 입에 발린 사랑을 말하는 신앙인들이 많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소개하고 그렇게 실천하도록 말씀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 따라 사랑을 교묘히 이용하며 논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것을 사회와 교회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사랑한다면서,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아마 “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크게 자신했지만, 나약한 여인 앞에 그만 넘어진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자, 주님 말씀이 떠올라 괴로운 마음으로 한탄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여기 나오는 베드로를 ‘못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마도 베드로보다 더 심한 부인으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다가 결박해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그 말씀을 들은 사울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의 백성들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잡아다 결박하며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과 실제적으로 만난 순간, 변하여 주님의 복음 사역을 위한 전도여행을 하면서 갖은 고초와 질고를 당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결국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늘 입만 열면 앵무새처럼 ‘사랑’을 떠들고 다니지만, 그저 울리는 습관적인 소리요 꽹과리일 뿐입니다. 정의와 공정, 공평과 상식을 뛰어넘은 하나님 나라의 민주주의,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며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입으로만 울부짖는 광란의 패거리들은 국민들을 사랑한다면서 나라가 망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들의 권력과 잇속 챙기기기에 혈안이 돼 있느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애타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지금도 듣지 못하니 그 결과는 오롯이 멸망의 길뿐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깊은 양심까지 저버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국회의원들은 죄를 지어도 양심은커녕 되레 더 큰 소리로 외치고, 국민 살림살이와 국가 안보는 뒷전인 채 자신의 영욕을 위해서만 일하고 있으니,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그들의 오염된 술수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많을 터, 그들은 어찌하여 함구하고 있는지요? 로마 시대와 일제 시대, 압박 속에서도 굳건히 주님과 사람들을 위해 피 흘려 희생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공로로 지금껏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모리배 정치와 함께 천인공노할 죄를 지어도 말 한마디 못 하는 국회의원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입니다.
세상의 안위와 행복에 젖어 주님을 잊고 교회 안에서 중상과 모략 시기와 질투, 그리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권력을 누리기 위해 아부와 아첨, 거짓말은 식은 죽 먹듯 하며 양심마저 내팽개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회개를 본받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한 해를 보내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주위를 둘러보며 서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