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26)-치마부에
나폴리 예배처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고종의 시의요 선교사였던 알렌의 후손이 미군이었고 그의 부인이 한국인으로 출석하였다. 알렌 선교사는 고종의 시의로 있으면서 다양한 수집가였는데, 그 수집한 것들을 후손들에게 골고루 나눠 줬다고 한다. 조상 중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남북전쟁 시절 장군으로 임명받을 당시 대통령이 사인한 임명장, 작은 청자와 민비가 하사했다는 비단, 그리고 우표, 또한 내각 회의를 할 때 앞에 붙였던 표지(외무대신 등등), 그리고 다양한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그 자매 분은 유물의 가치를 알지 못했고 이사할 때 귀찮은 물건으로 치부하였기에, 약간의 감사 표시로 충분히 증여받을 수도 있었고 그래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후회막급이지만…….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에 사는 90세 된 여인이 이사를 하려던 차에 부엌에 걸려 있던 오래된 그림에 대해 알아보려고 전문가를 불렀다. 그 그림은 목판에 그려진 비교적 작은 사이즈로, 오래되어 낡은 모습이었다. 노인이 참 영악하다 싶다. 그런 그림을 쓰레기로 처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전문가는 적외선 분석 결과 그 그림이 르네상스의 문을 연 치마부에가 그린 ‘조롱당하신 예수’ 그림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그림이 경매에서 무려 300억에 낙찰되었다. 아마도 그 할머니는 너무 놀라 수명이 단축되었겠다 싶다. 계속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잘 수 없었겠고,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도록 FBI 요원을 고용해야 했겠다 싶다. 프랑스 정부는 곧 이를 국보로 지정하고, 2년 6개월 동안 해외로 반출을 금한다고 발표했다.
치마부에(Cimabue, 1240-1302)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인문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산타마리아 노벨라에 거주하는 친척에게 보냈다. 그 친척은 수녀원의 수련자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러나 치마부에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공책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차에 그리스에서 화가들이 피렌체의 초청을 받아 찾아왔다. 치마부에는 큰 흥미를 느껴 그들을 찾아간 뒤 그들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하고 본격적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실력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스승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워낙 재능이 출중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다. 재능이란 놀라운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정명훈 선생은 이런 얘기를 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오디션을 받으려고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은 정명훈 선생처럼 세계적인 지휘자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인정을 받을 때 무대에 설 수 있고, 머지않아 세계적 음악가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휘자들 역시 뛰어난 음악가를 목마르게 찾는다고 한다. 그런 재능있는 음악가와 연주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휘자들은 어떤 사람을 뽑느냐고 물었더니, 오디션을 위해 세계적인 지휘자를 찾는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 어느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주신 재능이라고 한다. 즉 예술세계에 있어 최상은 신이 부여하신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치마부에는 그런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 그는 그리스 화가로부터 회화를 배웠지만, 비잔틴 회화의 도그마를 뛰어넘었다. 그것이 치마부에의 위대한 점이고 천재성이다. 그래서 단테는 그를 자랑스러운 그룹의 자리인 신곡의 연옥 11번째에 배치했다.
그는 그림에서 비잔틴의 아이콘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첨삭하였다. 즉 명암대비, 머리 모양, 공기, 휘장의 주름, 등장인물의 심리적 묘사 등으로, 비잔틴의 딱딱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천편일률적인 그림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획기적 기법이었다. 그런 그림들이 산 도메니코의 십자가상,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옥좌에 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 등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잔틴의 아이콘을 버리고 점점 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조토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그의 명성은 이내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사후 200년이 지나서 화가이자 최초의 평론가인 바사리(Vasari)의 노력으로 그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서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신이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다만 선배의 땀과 수고의 결실을 디딤돌로 하여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고로 그 누구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미켈란젤로는, 죽기 얼마 전에 선배 브라만테가 설계한 바티칸 돔을 맡게 되었을 때, 가능한 브라만테의 설계도를 변경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철이 드는 인생이다.
치마부에는 자신의 천재성으로 비잔틴의 아이콘에서 르네상스의 자연주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피사에서 삶을 마감했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