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선의 종소리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이제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정치꾼들의 놀음에 애꿎은 백성들만 고단해집니다. 말로는 국민들을 위한답시고, 하는 꼴들은 오히려 국민들을 피눈물 흘리게 하는 거짓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나라의 향방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4년도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두고, 구세군의 자선의 종소리가 길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수고하는 분들께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부한 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교훈을 전해 줍니다. 현 세대의 부한 자들은 재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하거나 헛된 소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참된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가진 것을 믿는 형제들과 나눠 갖기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물을 나눌 때 마음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들은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장래 상급을 확실히 얻게 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업과 공업이 성행한 ‘에베소’에서는 부유한 사람이 많았고 이들 중에는 교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에 대한 교훈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자들에게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의뢰할 것과, 물질을 구제나 선한 사업에 사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을 빼고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사와 마태복음 14장 15-21절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사는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르게 구전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된 언어들과 숫자의 차이 등으로 미루어, 서로 다른 두 사건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 입장입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 말씀 중 축사하신 후, 성만찬을 연상시키는 ‘축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한은 비록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세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께 의지하여 행동하신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군중들은 자기들을 배부르게 먹여주신 예수님을, 오시기로 약속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열렬이 환호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자기들을 구출해줄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하며 열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한 아이의 베풂과 나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혼자 몰래 먹어도 됐지만, 용기 있게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아이의 장성한 후 기록이 없어 아쉽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평생 복음 전파에 전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 사복음서 모두 기록된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아이의 장래가 참으로 밝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마 예수님 말씀에 감동해서, 자신이 먹어야 할 음식 전부를 내놓았을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나누기를 좋아하는 베풂의 삶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도우며 나누고 베푸는 삶에 너무 약합니다. 지금은 매일 전국 곳곳에서 구세군 자선냄비를 알리는 자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함께 동참하고자 종소리를 들으며 지나가보지만, 곁눈질만 한 채 동참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아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입으로는 구제를 논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웁시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가족이 함께 동참해,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겨울이 될 수 있도록 모두를 안아주는 정겨운 모습이 되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선냄비는 1928년 12월 15일 서울 명동에서 처음 시작됐습니다. 당시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조셉 비아) 사관이 자선냄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첫 해에는 홍수와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돕는 데 사용했고, 이후 자선냄비는 매년 연말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대표적 기부활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구세군(救世軍)은 ‘구제하는 군대(The Salvation Army)’라는 뜻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에 힘쓰는 개신교 한 교파입니다.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실업자와 최하층 빈민들을 위한 선교와 구호 기관으로 시작해, 곧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군대 같은 조직을 갖춰 구세‘군’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매년 성탄절 시즌 거리에서 운영하는 빨간색 자선냄비 모금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구세군은 전 세계 128개국에 교회 및 센터가 있습니다. 국제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으며, 사회복지단체 및 병원과 학교 등 기관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자선냄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 또는 구세군 단원 및 성도들입니다. 이 분들은 구세군 활동을 돕기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로, 구세군 단원은 구세군 군대식 조직에서 활동하는 정식 구성원이며, 자원봉사자는 일반 시민으로 나눔 실천을 위해 참여하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구세군 자선냄비는 주요 거리와 지하철에서 빨간 냄비와 함께 종소리를 울리며 시민들에게 기부를 독려합니다. 이 모금활동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도움을 전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 평가받습니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 구세군 출신이라 더욱 관심도가 높고, 구세군에 대한 애정도 참으로 큽니다.
점점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열지 못했던 자선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 연말이 가기 전 주님의 구제 사업에 동참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름다운 자선은 신앙인들의 가장 구체적인 사랑 고백이자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단순히 가진 것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신실한 자선은 불우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신실한 사랑과 감동으로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같이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존중하고 보다 친숙한 배려 속에 자선의 문화를 계속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원동력이 됐던 한 작은 아이의 나눔, 즉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 늘 가슴 속에 담겨, 사람들이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문화를 하루속히 정착시켜야 하겠습니다.
자선의 종소리가 지금도 쉬지 않고 들려오는 겨울밤, 칼바람을 뚫고 거세게 불어오는 깊은 밤입니다. 댕그랑 댕그랑~~.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