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공화국’ 시인 양성우의 ‘오오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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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의 신앙시, 기독 시인 7] 양성우 시인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예수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예수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

오오 하느님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서정(抒情) 시집, 실천문학사, 1982

그 누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라도

오오 하느님. 이 세상은 모조리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는 곳마다 숨어계시는 이여.

당신의 채찍질은 너무 아프고

당신의 욕심 또한 지나치게 이 어깨를

짓누릅니다.

드디어 이제는 끝도 없는 시련으로

허리가 굽고

설움이 지나쳐 가슴에 가득히

피눈물뿐이니

오오 하느님. 비로소 당신의 덫에서

놓아 주소서.

오히려 밥보다 더 짙은 어둠 속을

떼지어 달리며

마지막 남은 말을 큰소리로 외치고

결국은 당신이 버리신 마른 들풀로

뿌리까지 송두리째 타오르겠읍(습)니다.

오오 하느님. 가시나무 돌자갈밭

가는 곳마다 숨어계시는 이여.

당신의 손으로 나를 벌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겨울 공화국(共和國)
<예수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 중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걸 웃어대거나 웃다가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랑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은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양성우 시인. ⓒ창비

▲양성우 시인. ⓒ창비

양성우 시인(1943. 11. 1-)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전남대 국어국문학과와 숭실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여타 시인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남성의 팔뚝 같은 시를 쓰는 탁월한 시인들이 있었다. 모두 호남 출신들이다. 조태일(1941-1999)과 이성부(1942-), 그리고 양성우 시인이 그들이다.

하지만 민족시인 신경림(1936-2024)은 양성우 시인에 대해 “이름만으로 아는 사람들이 그를 억세고 거센 사람으로 안다고 한다. 그가 겪은 온갖 어려움이 그의 이미지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경림 시인은 “알고 보면 그는 더없이 정겹고 따스한 사람”이라 했다. “이 정겨움, 따스함, 눈물 많음이 거꾸로 그로 하여금 배부르고 등 따스운 자리에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시도 사람처럼 정겹고 따스하고 눈물이 많다.

글은 곧 사람이라, 글과 사람이 그토록 일치하는 예를, 신경림 시인은 양성우 시인을 제쳐놓고 따로 찾아보지 못했다 고백한다.

양 시인의 시에는 유난히 나, 그대, 당신 등이 시어로 자주 등장한다. 이 시어들도 그의 사회성, 관계성을 말하는 구절일 것이다.

필자는 양 시인의 따스함과 눈물과 맑고 고운 시의 숨결은 남성의 정의와 팔뚝 같은 정으로 여겨진다.

​양 시인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4.19 혁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을 만큼 뚝심 있는 모습이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인물로 유명하다.

광주중앙여고 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던 유신정권 하(1975년), 정권을 비판하는 유명한 <겨울 공화국>이라는 시를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교사 자리에서 파면된다.

1977년에도 <노예수첩>이라는 정권에 비판적인 시를 발표하였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과 국가모독죄로 수감되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잘 안다. 그의 정의감과 뚝심을 알 수 있는 역사의 장면들이다.

​1988년, 정치에 뛰어들어 평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나 당시 야당 공천심사위원이었던 노무현 의원과 언쟁을 벌이다 흥분하여 재떨이를 발로 차 노 의원이 입술이 터지고 앞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도 다혈질적인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사건이었다.

안치환의 민중가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곡이 되었으니, 세상의 섭리는 참 아이러니하고 패러독스적이다.

그런 그가 보수의 편으로 돌아선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좌파 또는 진보에서 보수로 정치적 전향을 한 다양한 인물들이 있다.

김문수 장관(전 경기도 지사, 현 노동부 장관), 최초 여검사 출신 조배숙 의원과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측근이었던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유동규, 그리고 조정훈 의원과 양성우 시인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보다 근원적인 결단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기독교인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좌파들의 위선적 정치관과 세계관이 이들의 신앙적 세계관과 융합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좌충우돌하다 엉뚱하게도 우파에서 극좌로 전향한 자칭 ‘생계형 정치인’ 김원웅 같은 온갖 논란이 많았던 비상식적 인물도 있기는 했다. 당연히 신앙인은 아니었다.

눈치 빠른 좌파들이 이후 양성우 시인을 외면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양성우 시인만큼 뚝심 있고 우직한 민주 투사요 탁월한 진보적 정감 넘치는 시를 쓰는 시인을 찾지 못했다.

5.18 전야제, 빛 고을 술집에 모여 접대하는 여성들과 더불어 온갖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위선적 유명 시인, 정치인들을 고발한 임수경 전 의원만큼의 분별력이라도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조덕영 박사
신학자, 칼럼니스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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