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칼럼] 르네상스(27)-기베르티
놀라운 번영은 중단없이 계속될 줄로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흑사병이 찾아와 인구의 반이 캄캄한 무덤에 들어가야 했다. 방금 전 인사했던 이웃들이 시신으로 변했고, 왁자지껄하던 인기척이 사라지고 침묵만 감도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고요한 적막 속에 죽음의 사자가 어슬렁거리는 두려운 도시로 변했다. 흑사병이 강타한 피렌체의 실상이었다.
몇 년 전 밀라노 근교 코도그노에서 코로나가 시작됐고 치료약도 없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맨손으로 환자들을 대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자 문제가 심각했다. 묘지와 화장장이 턱도 없이 부족해 관을 쌓아 놓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시신을 실은 군인 트럭들이 화장장이 여유가 있는 곳을 찾아 줄지어 부지런히 달려가야 했다. 그때 세상을 떠난 분들은 가족도 제대로 대면할 수 없었다. 전염의 두려움 때문에.
그러나 중세 피렌체의 혼란은 코로나로 인한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심각했다. 인구의 절반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저승에는 동기생들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대응을 해야 했을까?
저들은 신앙교육을 받은 대로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마음을 모았다. 그것은 두오모 성당보다도 오래됐고, 피렌체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어김없이 세례를 받은 세례당의 문을 아름답게 장식하자는 의견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명분으로. 세례당 청동문의 장식은 성경의 내용을 조각하도록 했고, 그 일을 위해 공개적으로 가장 뛰어난 조각가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물론 선정된 조각가에게는 명예와 큰 포상금도 내걸었다. 심사위원은 각계에서 활동하는 자들로 선정됐는데, 모두 34명이었다. 이를 위해 경비를 후원한 단체는 양모 사업으로 큰 부를 이룬 양모 길드(조합)였다.
그런데 많은 지원자 가운데 최종적으로 결선에 오른 사람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두 사람이었다. 당시 기베르티는 24세, 브루넬레스키는 25살이었다. 두 사람에게 “희생제물이 된 이삭”이라는 주제로 34Kg의 청동판(가로 33Cm, 세로 43Cm) 네 개씩을 줬고, 제작 기간은 1년간으로 한정했다. 그것은 세공사 및 조각가들에게 인기와 명예와 부가 걸린 경쟁인 셈이었다. 더 나아가서 당선되면 세례당이 존속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신앙적으로도 공로를 이루게 되는 성스러운 예술 활동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결선에 오른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 판이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오만했다. 그래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혼자서 비밀스럽게 했다. 그에 비해 온유한 기베르티는 제작 과정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줬고, 솔직한 평을 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기베르티는 거의 완성되다시피 한 작품을 파괴하고 다시 만들기도 했다.
드디어 작품을 공개하는 날이 왔다. 두 사람의 작품은 상의라도 한 듯 비슷하게 제작됐다. 같은 주제였기에 심사하기가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베르티의 것은 평이했지만, 브루넬레스키의 것은 과격했다. 즉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은 아브라함이 한 손으로 이삭의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에 든 칼로 목을 찌르려고 하는 형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작품에 손을 들어 줬다. 다만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도 탁월하니 공동 제작을 하도록 결의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친구 도나텔로를 대동하고 로마로 유학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떠나 버렸다.
두 사람이 출품한 작품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내용과는 다르게 제작됐다 싶다. 이유는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단(바위) 위에 장작을 쌓고, 이삭을 결박해 올려 놓고(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자세였을 것임), 칼을 들어 이삭을 향해 내려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삭이 단 위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모습으로 제작했다.
아무튼 기베르티는 경선에서 뽑힌 이후로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 20년이 걸려야 했다. 또한 처음에는 양모 길드가 구약을 주제로 만들도록 주문했는데, 두오모 성당 관계자는, 세례당의 동쪽 문이 교회 입구와 마주보고 있으니 작품에 신약의 주제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기에). 그래서 기베르티는 28개의 신약 주제를 담아 청동문을 완성했다. 20대 중반에서 시작한 작업이 무려 40대 중반이 돼서야 끝났다. 그러자 발주자 측은 세례당의 북쪽 문도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제작한 동쪽 문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거절했을 텐데, 온유한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는 27년이나 걸려 북쪽 청동문을 완성했다. 미켈란젤로는 그 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천국의 문은 천지창조부터 시작해 구약의 중심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북쪽 문이 완성되자 주최측 양모 길드는 문을 바꿔 달도록 부탁했다. 사실 두오모의 문과 마주하는 세례당의 문은 신약을 주제로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모 조합은 북쪽 문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고집을 피웠고, 그들의 주장대로 문은 바뀌게 되었다. 저들은 더 아름다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들의 공로가 크게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성당을 건축할 때 공로가 크게 되고, 또한 성당 건축에 많은 헌금을 하게 될 때 성당 안에 개인 기도실을 받을 수 있고, 그 자리도 신부가 미사를 주도하는 단의 바로 뒤나 옆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곳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중세 시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진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베르티는 피렌체의 변두리 펠라고(Pelago)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의 내연남이자 금 세공사였던 미켈레의 바르톨리(Bartolo di Michele)와 함께 살았다. 다정했던 의붓아버지는 어린 기베르티에게 금 세공 기술을 정성껏 전수해 줬다. 또한 기베르티는 읽고 쓰는 법과 수학과 라틴어 등을 배웠고, 그리고 고대 문헌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천재적인 재능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익힌 것이다. 이는 의붓아버지의 영향 덕분이었을 것이다. 기베르티는 1407년에 이르러 공방을 인수했고, 의붓아버지의 이름, 즉 바르톨리 미켈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와 관계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방은 도나텔로, 우첼로, 마솔리노, 안토니오 등 중요한 예술가들을 훈련하는, 피렌체의 중요한 장소가 됐다.
기베르티는 오르산 미켈레 성당에 조각품을 남겼는데, 세례 요한, 마태, 스데반이다. 특히 세례 요한은 청동 작품으로 2.5m에 이르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는 피렌체에서 삶을 끝냈고, 그의 유해는 산타 크로체 교회당에 묻혔다.
의붓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깊은 속에 침전돼 있던 천재성을 아낌없이 길어 올린 기베르티다. 자신이 부여받은 재능으로 세례당 문에 성경의 내용들을 아름답게 조각했다. 그래서 당시 글을 모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더듬어 알게 했다. 삶을 요약할 때 주님을 위한 삶이었음을 보일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싶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