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성애 유전자?
상담학을 비롯한 심리학, 사회복지와 같은 사회과학 학문에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돕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접근법들을 사용한다. 그것들을 사용하기에 앞서, 신뢰성을 확인하게 위해 ‘증거 기반 접근’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연구를 통해 효과가 증명된 것들은 신뢰성을 갖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측면은 많은 표본을 통해 객관성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학에서 자녀 양육을 논할 때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50%가 유전이고, 50%가 환경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행복학에서도 이야기한다. 행복감은 50%는 타고나는 것이고, 나머지 50%은 본인이 행복한 마음을 위해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2019년 영국 바이오 뱅크에서 23&Me 데이터로 약 5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50만 명이라는 표본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는 것은 상당히 사회인구학적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동성애의 유전적 요인 연구 결과 ‘단일 게이 유전자’는 없으며, 전체 게놈을 놓고 봤을 때도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은 8-25%에 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간 유전자 분석 전문기관인 23&Me의 수석연구원 파 사티라포가츠는 “유전자 변이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현상으로, 그것으로 개인의 성적 지향성을 예측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성적 지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없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요 주장 중 하나가 “동성애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므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유전자 변이로 나타나는 아주 미미한 변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보통 선천적으로 타고나는지는 일란성 쌍둥이로 많이 연구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 애착 경험과 친구 관계가 비슷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란성 쌍둥이 대상 연구에서 동성애 일치율은 남성 9.9% 여성 12.1%로, 대략 10% 밖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 외에 증거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연구 결과들도 동성애가 선천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의학신문에 연구 결과를 올린 고두현 한국 성과학연구협회 연구팀장은 “바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정치가 과학을 삼켜 버릴 수 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어쩌면 아주 소수인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지금까지 잘못된 메시지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자라나는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정체성 혼란을 가지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우려해 보게 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 증명되지 못했음에도, 50만 명 대상 연구 결과에 동성애 옹호자들은 반응한다. 그 연구 결과가 동성애는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해석을 뒤바꾸는 것이다.
연구 결과는 선천적으로 동성애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증명하는데, 그들은 후천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고 사실을 왜곡시킨다.
최근 유튜브에서 동성애에 대한 단편영화를 보게 됐다. 한 아이가 이렇게 말을 던진다. “너랑 나랑은 친구야, 친구끼리는 뽀뽀를 안 하는 거야!” 그러자, 다른 한 아이가 이렇게 반응한다. “친구끼리는 왜 뽀뽀를 하면 안 되지?”
그 말을 들은 순수한 아이는 흔들린다. 자신이 그동한 너무 편협하고 제한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성적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에 동성애를 통해 성적 경험을 하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친구끼리는 뽀뽀를 안 하는 거야”라고 말한 아이의 의미는 같은 성을 가진 친한 친구끼리는 반대 성별과 갖는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성관계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됐을 때만 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가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아이의 반응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정상적 반응을 한 아이는 정상이 아니고,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아이의 사고를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미묘한 왜곡이 섞여 있다. 마치 위 연구 결과에 동성애 옹호자가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남녀의 구별로 이루어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성적 영역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정체성 혼란을 경험할 수 있는데, 잠시 겪은 방황이 잘못된 성 정체성으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사회가 부추겨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남성과 여성이라는 유전적 특성은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을 존속하려면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통해 생명이 탄생돼야 하며 그것이 세상에서 지속돼야 한다. 그것은 신의 섭리이자 자연 현상이다. 그래서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린 시절 우화 중 ‘벌거벗은 임금님’이 있다. 임금님을 속이고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한 재단사의 말을 듣고 임금님은 벌거벗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아무도 옷을 입지 않았다고 표현하지 못했다. 한 아이만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정직하게 외친다. 아이가 그렇게 외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사회는 여성의 몸을 가졌는데 남성이라고 하는 사람을 인정해야 하며, 그런 사람을 정상적이지 않게 보는 것은 공포증에 걸린 질병을 가진 사람이니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음 아픈 것은 사춘기 아동이 정체성 혼란을 겪을 때 그런 아이들을 지도해 주는 것조차 해선 안 된다고 규정짓는 나라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말하지 못하던 우화 속 사람들과 비슷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힘이 없었던 여성이나 아이들, 신체·정신 장애인들, 피난민들 등 모든 사람의 권리는 존중되고 보호돼야 하고, 그들의 권리를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고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에 열정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대부분 일반 사람들의 권리나 정상성에 대한 기준을 흔들어 놓고 모든 것이 옳고 다 수용돼야 한다는 논리적 오류에는 빠지지 않아야 한다.
미국에서 연쇄 강간범 남성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자신은 여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해서 여성 감옥에 넣는 것은 또 다른 역차별이다. 원하지 않는 강간범 남성과 한 방을 써야 하는 여성 죄수가 역차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가 그 여성 죄수는 수감 기간이 5년이나 늘어나는 경우도 실제 있었다.
갑자기 건장한 남성이 여성 탈의실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고 놀라 의견을 제시했다 해서, 혐오감을 주고 놀라게 했다며 법적 처벌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악용할 여지가 너무 많은, 위험한 법이다.
가정이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적 모형이었다. 그것을 통해 생명이 탄생되고, 그것이 모여 지역과 공동체가 형성되며, 나라가 생기고 인류가 유지돼 왔다. 앞으로도 그러한 가정이 지켜져야 건강한 사회가 되고, 인류가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를 통해 건강한 가정이 계속 지켜져 나가기를 소망한다.
서미진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부학장
호주 한인 생명의 전화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