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에 제작된 이탈리아 영화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를 보았다. 천재 작곡가이자 세계적은 음악가요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의 일대기였다. 그는 나폴레옹이 통치하고 있던 때 북이탈리아의 부세토의 론콜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식료품 가게 및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게를 찾아오는 떠돌이 바이올리니스트에 의해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웠는데, 늙은 반주자가 은퇴하는 바람에 10세의 나이로 그 자리를 물려받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구요 음악을 좋아하는 바레치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바레치를 통해 음악가 프로메시에게 작곡을 배웠고, 그의 음악학교에 청강을 허락받았다.
바레치는 베르디를 밀라노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그러나 베르디는 3년 동안 밀라노에 머물며 스칼라 극장 단원인 라비나 선생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 21살에 고향 부세토로 돌아와 음악감독직을 맡았다. 그리고 23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후원자 바레치의 딸이자 동갑내기인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1836년).
그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자신이 작곡한 최초의 오페라를 공연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스칼라 극장의 소유자 메렐리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렐리의 의뢰로 오페라를 작곡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월세방에서 아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우 힘든 상황에서 작곡한 ‘가짜 스타니슬라오’(하루만의 임금님)을 스칼라 극장에 올렸으나, 크게 실패하고 하루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그는 다시는 작곡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자살까지 하려 했다. 영화에서는 배가 고파 식당에 들어갔으나 주인은 외상은 안 된다 하여 쫓겨나기까지 했다. 배가 고파 길거리의 군밤 장수에게 목도리를 벗어주고 군밤을 얻기도 했다. 병든 아내는 밀린 집세를 위해 결혼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야 했고.
그런 중에 결혼 4년 만에 그동안 태어난 두 자녀가 죽었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지식한 베르디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절망하여 음악을 포기하려던 상황에서, 당시 일류 성악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의 도움과 조언으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내를 보내고 독신이었던 베르디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세피나를 향해 마음이 열리게 되었고, 곧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내는 죽어가면서 베르디를 염려했다. 곁을 지킨 아버지에게 “장차 다시 결혼하게 될 남편의 아내는 정숙하고, 남편을 진정 사랑하는 여자여야 한다”는 유언과 함께 자신의 결혼반지를 아버지에게 남겼다. 베르디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 넘겨주라고.
베르디가 주세피나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릴 때부터의 후원자이자 장인은 연주 중인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남자가수 및 극장 지배인과의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두었다. 당시 사회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위대한 작곡가의 아내로서는… 그래서 “당신이 베르디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성공을 위해 물러나라”고 설득했다. 주세피나는 베르디를 진정 사랑하였지만, 이런 부탁을 듣고는 베르디 장인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한편 베르디는 주세피나에게 결혼하자고 요구했으나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그러면 지난번 왜 키스를 했느냐고 따지자, 그것은 연극이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배신에 치를 떤 베르디는 그런 연극으로 사기치고 돈이나 많이 벌라고 고함을 쳤다. 그 후로 무려 17년 동안 베르디는 여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1947년 3월, 스칼라에서 나부꼬를 초연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청중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되었고, 장장 57회나 연장 공연을 했다. 스칼라 최초의 일이다. 밀라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당시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독립의 기운이 싹을 틔우고 있었기에 국민 정서에 부합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껄끄럽게 여겼다. 나부꼬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조국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구성됐지만, 사실은 이탈리아의 독립을 소망하는 내용이다. 당시는 검열이 극심하였기에 알레고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나부꼬의 성공으로 매 시즌 신곡 하나씩 작곡하기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나아지자 돈 때문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첫 부인과 두 자식에 대한 연민은 더해졌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배신한 주세피나에 대한 원망도 깊어갔고……. 그래서 1851년에 작곡한, 프랑스 왕의 배반 행위를 그린 리골레토에서, 공작이 부르는 ‘여자의 마음’(la donna mobile)에는 사랑을 배반하고 떠난 주세피나에 대한 애증이 서려 있다. 그래서 공작을 통해 “여자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1853년에 작곡한 라트라비아타에서도,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슬픔에 대해 주인공 비올레타를 통해 “이제 모두 끝났다”고 고백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베르디는 주세피나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로시니처럼 쉽게 마음을 주고 쉽게 싫증내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르디는 리골레토를 연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곳에는 존경하던 이탈리아 음악 선배들이 있었다. 롯시니, 도니제티 등등…….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왕은 즐긴다”를 원본으로 만든 작품인데, 연출가가 대본을 여러 번 수정하자 저자 빅토르 위고는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베르디는 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가 놀랍게도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주세피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무리한 연습으로 목소리가 망가져 은퇴하고 파리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베르디가 자신에 대한 애증이 크다는 것을 알고는, 학원을 접고 비밀리에 떠나 버렸다. 뒤늦게 장인으로부터 주세피나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은 베르디는 자신이 그동안 크게 오해했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았다. 결국 장인에 의해 그녀를 찾게 되었고, 그녀의 손가락에 전처가 넘겨 준 반지를 끼워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려 17년 만에 오해를 풀고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다.
돈도 많고, 명예와 인기가 높았고, 최고로 아름다운 성악가들과 함께 일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베르디였다. 그런 베르디, 국가의 보배 같은 그가 주세피나와 결혼하는 것을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사보이 왕국(토리노)으로 가서 비밀리에 결혼했다. 환영하는 사람 하나 없이…….
베르디는 결혼으로 안정을 찾은 후에, 대작 아이다를 작곡했다. 이집트의 술탄이 파나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해 작곡을 의뢰하자, 베르디는 여러 번 거절했다가 응했다. 일설에 의하면 베르디가 “거절하면 바그너에게 의뢰하겠다”는 말을 듣고 응했다고 한다. 당시 베르디와 바그너는 경쟁자였다. 참고로 바그너는 독선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나, 베르디는 검소하고 소박한 성격이었다. 음악적으로 바그너는 초현실적인 내용(신화)을, 베르디는 현실적인 내용을 주로 다뤘다.
베르디는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로 마치니(Alexandro Manzoni, 1785-1873)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해 1873년 레퀴엠을 작곡했다. 특히 ‘진노의 날’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명곡이다. 그리고 1887년 스칼라에서 초연한 오텔로를 작곡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는 79세나 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롯시니는 37세에 빌헬름 텔을끝으로 76세로 죽기까지 작곡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아내 주세피나는 1897년 11월 14일에 폐렴으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는 베르디가 침대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그렸는데,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머리맡에 놓인 사랑하는 아내 주세피나의 사진을 쓰다듬는 장면이었다. 아내가 떠나고 4년 후에 베르디도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묘지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으나, 당국은 그를 밀라노시의 유명 인사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다 많은 군중이 합장을 요구하자, 한 달 만에 아내가 묻힌 곳(베르디가 자신의 기금으로 만든 늙은 음악인들의 양로원)으로 이장했다. 이장식에는 30만의 인파가 몰렸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성악가 800명을 동원하여 베르디가 작곡한 나부꼬의 Va Pensiero(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를 하늘 높이 부르게 했다. 밀라노가 진동하도록.
그는 이탈리아를 깊이 사랑했고, 조국의 통일운동에 기여한 위대한 천재 음악가였다. 그 받은 재능을 죽기 전까지 유감없이 사용했고, 그로 인해 벌어들인 수입까지 후배들을 위해 헌납한,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