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람에게 정해진 것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27-28)”.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그 후에 심판을 받는다는 부동의 사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심판(이때 그리스도는 심판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주이십니다)이 인간에게 내려진다는 사실에 적용시킵니다.
마지막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은 재림하셔서 심판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해서 해마다 반복됐지만, 신약의 제사는 완전해서 단 한 번만 드려지므로, 죄를 완전히 없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지니라(히브리서 6:2)”.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유대인 성도들은 동족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 체제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에게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브리서 6:2)”고 권고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유대교에서는 많은 것을 잃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이 서신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라는 표제가 붙어 있지만, 그 것을 입증할 만한 고대 필사본은 없습니다. 가장 오래 되고 믿을 만한 헬라어 본문 표제는 ‘프로포스 에브라이우스(히브리인들에게)’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족보와 같이, 히브리서의 기원도 알려져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뿐 아니라 기록 장소, 기록연대, 수신인 등도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8-24절을 보면, 이 서신의 수신인은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 전승은 저자에 대해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바울이 저자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바나바, 누가 혹은 클레멘스라고 주장했으며, 저자를 알 수 없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외적 증거로는 저자를 확정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내적 증거에서도 애매한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의 언어, 문체, 신학 등이 바울 서신과 유사한 점, 디모데를 언급한 점(13:23) 등이 바울을 저자로 보는 근거가 되나, 이런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더 많아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 누가, 로마의 클레멘스, 아볼로, 실라, 빌립, 심지어 브리스길라를 저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정적이진 않습니다.
‘70인역’만 사용한 점, 우아한 헬라어 어법이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히브리서는 이방인들을 위해 쓰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 원래 수신인이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전통적 견해가 훨씬 타당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 장소는 알 수 없으나, 기록 연대는 추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A.D. 95년 로마의 클레멘스에 의해 인용됐고,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구약 성경의 희생제도가 끝났음을 언급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히브리서는 그 전에 쓰여졌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성(1:1-3, 8)과 인성(2:9, 14, 17, 18)이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그의 성품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20개 이상의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전의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하시며, 최고의 희생을 치르시고 최고의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며 최고의 언약을 제시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목처럼, 사람은 낙원에서 창조된 후부터 이미 세상과 우주 만물과 더불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미 죄를 지었기에 늘 사탄과 마귀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류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8-19)”.
인류의 시조가 이렇게 간교한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버려, 인류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과정 속에서 살게 됐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미래를 축복하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사악함 때문에 깊은 죄악이 자신에게까지 들려, 그 악함을 확인하시고 그 두 도시를 멸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두 도시의 자비를 빌면서, “하나님께서 만약 저 도시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의인이 악인과 같이 벌을 받는 정의롭지 못한 일이 생길 텐데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만 찾아내면, 온 지역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었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염치 없음을 사죄하면서 “5명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45인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자신의 염치 없음을 사죄하면서, 40명, 30명, 20명으로 요구 조건을 깎았으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큼 의인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사정합니다. “부디 노하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이번만 더 아뢰겠습니다. 10명만 있어도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시 “10명만 있어도 이곳 성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결코 피해갈 수 없지만, 의인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의인을 위해 참고 기다려 주심을 교훈하는 사건입니다. 사악한 인간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대로 멸망시키신다는 교훈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악인은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고, 겉으로 볼 때 악인들이 잘 되고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을 신앙인들에게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혼란을 넘어 속된 말로 ‘독사가 우글거리는 사악한 시대’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기조차 힘든 상황까지 왔습니다. 곧 소돔과 고모라에 뿌려졌던 하나님의 진노가 재앙의 날로 곧 시작되지 않을까요?
야당 대표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대는 말에는 진실이 없고 거짓과 사기, 꼼수와 진흙탕이 돼 버려, ‘늑대의 탈을 쓴 악마’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목적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가 싶겠지만, 이제 막판임을 감지했는지 법조차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올인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속았다며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뿜어내는 화마의 발악은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 점은 170명 넘는 야당 의원들 중 당 대표가 잘못하고 있다고 충고를 던지는 의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야당에도 장로님이 계실 것이고, 타종교 지도자들도 분명 있을 텐데, 어찌 자신의 당이 분명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소리 한 번 내는 사람이 없을까요.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악마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는 그들은 양심이라도 하나님에게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툭 하면 권모술수와 거짓말,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한 행동 등으로 일관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텐데, 그때는 문 닫은 배를 향해 소리치고 난리법석을 해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 정녕 모르고 있을까요?
오늘 소돔과 고모라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멸하시리라”는 말씀에 신속히 대처했던 아브라함과 대조적으로, 롯은 지체했습니다. 세속과 결별할 만한 믿음의 결단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롯은 천사의 도움으로 달아나면서도, 두고 온 지난날의 모든 것에 미련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롯에게 “들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것은 교리나 지식에 의지해 환난의 때를 보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들이 아닌 산은 거룩한 사랑과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은 말씀의 지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경지까지 믿음을 승화시켜야 세상의 거짓과 악을 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사무엘상 26:22-24)”.
통합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사울 이름은 히브리어로 ‘구함, 요청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없앨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렸습니다. 그는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며 멋지게 원수를 용서합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체포하려 합니다. 그것도 공식 절차가 아니라 공수처, 경찰, 사법부 일부 부서 등에서 자신들 멋대로 대통령을 사냥하려 하는 시점입니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야당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현직 대통령을 마음대로 체포하는 나라가 됐을까요.
대통령이 체포되고 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는 공산화를 시작으로 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싶습니다. 공산화와 좌경 사상에 물들은 그들의 결집은 참으로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민들의 풍요로운 삶과 안전한 놀이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롯이 정권만 쟁취하려는 그들의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사탄의 꼼수는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나라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피눈물 기도와 이 땅 순교자들의 간절한 피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결코 이 땅은 공산화로 물들지 않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오래 참고 인내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이를 수용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멸망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소돔과 고모라의 교훈을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일러주고 계십니다.
지금은 모두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우리 신앙인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국민들은 저 교만한 자를 끌어내리고 주님의 군병들이 자유로이 기도하고 찬송하는 천국의 노래가 넘실거리는 풍요로운 잔치가 날마다 들려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사악한 저들의 만행을 뿌리채 뽑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