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태복음 21:12-13)”.
예수님 당시 성전이나 지금의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의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세속에서의 장사나 모임처럼 명예와 자랑, 교만과 탐욕이 춤추는 곳으로 전락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본문 속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론’은 ‘성전 경내’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성전 경내 중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바치는 돈은 규정된 화폐라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화폐를 교환해야 했습니다. 지금의 환전소 역할을 그곳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화폐를 교환해 주는 사람들이 상당한 수수료를 챙겨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또 짐승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데, 성전 밖에서 산 동물들을 불합격시켜 성전 안에서만 동물을 사도록 하고 엄청난 비용을 매겨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비둘기 한 쌍에 원래 10배 넘는 가격을 책정하는 등, 제사의 본래 정신은 잊은 채 돈벌이에 몰두하느라 가난한 순례자들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구절은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한 것인데,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1:12-13, 막 11:17, 눅 19:45-48, 요 2:13-16).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은 문맥상 “내 집은 유다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은, 상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점유해 버려 이방인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말씀을 복합 인용해 성전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바리새인이든 세리든, 누구에게나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전 지도자들은 상인들과 결탁해 성전 뜰을 ‘시장 바닥’으로 전락시키고, 순례자들에게서 폭리를 취함으로써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타락을 책망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란 말씀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병든 자와 외로움과 슬픔을 당한 자, 소외된 자 등 누구 할 것 없이 성전에 나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성전이고 교회임을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힘들고 아플 때만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아무런 염려나 걱정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 행동하다, 무슨 일을 만나거나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는 사회에서 행해지는 보편적 습성이 아닐까요. 필자 역시 잘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은 듯 찾지 않지만, 무슨 일을 당하거나 만날 때면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때로 ‘예수님께서 제 기도를 언제쯤 들어주실까? 왜 내 기도만 들어주지 않으실까?’ 노심초사하며 주님을 의심했던 일도 간간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고난을 겪고 있거나 병으로 아픔이 찾아왔을 때 더더욱 그런 생각에 젖지만, 한편으로 그 고통을 겪을 때 주님 이름을 부르며 잘못을 회개하는 기도를 했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신앙인으로서 주님을 향한 좀 더 구체적이고 굳건한 믿음과 확고한 신뢰가 부족하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을 기다리는 인내가 부족한 저 자신을 탓할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첫째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 예배 가운데 ‘기도와 찬양, 봉헌과 구제와 봉사’가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면모를 보일 때, 이웃과 사회와 나라는 절로 평화로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게 해야 할까요? 비신자들도 괴로운 일이나 험한 일을 당하면, 교회로 나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가꿔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을 빼면 교회는 문이 잠겨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슬픔과 괴로움을 하소연해야 할까요?
교회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지나가다 문득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회 내 귀중품을 도난당할까, 노숙자들이 들어와 잠을 자며 대소변을 보는 사례 때문에 문을 잠근다는 요즘 교회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착잡합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교회 대문은 활짝 열려 있어,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기도했습니다. 간혹 괴로운 일을 만난 안 믿는 사람들도 교회를 찾아 목사님과 면담을 하거나 함께 기도하는 광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려, 세상 사람들에게 든든한 이웃 교회가 됐습니다.
시계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라, 교회 종소리를 듣고 시간을 알 정도로 정겨워서, 지금도 그립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땡땡’ 울리는 교회 종소리가 ‘천당, 지옥’으로 들릴 정도로, 교회는 당시 세상을 리드하고 소금과 빛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를 지나칠 때마다, 들어가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칼바람이 불고 거센 폭풍이 휘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밤에도.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담요를 덮은 채 무릎 꿇고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던 수고로, 이 나라는 희망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주님 말씀에는 귀를 닫았는지, 성전이라기보다 사교장을 방불케 하는 장소로 전락했으니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덩치가 크고 신도 수가 많음을 자랑하며 건물을 치장하는 데 중점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많은 물질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평수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하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외로움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 삶에 찌들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스템과 정책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대형·중형교회 목사님들은 VIP 대접을 받는 데서 스스로 벗어나셔야 합니다. 주일예배를 제외한 시간에는 양복을 벗고 불쌍한 영혼들이 교회로 찾아올 수 있도록 기도를 쉬지 않으며, 불행한 이웃들의 친구가 돼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모범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23:3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 말씀은 천지가 사라지기 전에는 변함 없이 실행되고,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총회 헌법도 수정해야 합니다, 총회 헌법은 주로 목사와 장로들을 위한 것으로, 고쳐야 하지만 시대가 한참 지났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은 웅장하고 멋있게 지으면서, 오래된 헌법은 왜 그대로 놔두는지요? 시대 변화에는 어찌 그리 함구하시는지요?
시대가 바뀌었다고 설파하면서, 오래된 헌법의 기득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지도자들 아닐까요? 하루 속히 성도들을 위해 말씀 안에서 법을 수정해야 합니다.
교회 건물은 마치 바벨탑처럼 높이 올라감을 자랑하고,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성도들이 피땀 흘린 헌금으로 자신의 육신을 위해 사용하는 어리석은 종들이 있으니, 통탄할 일 아닙니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강조하신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읍시다. 내 지식과 경험과 판단만 옳다는 자만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는 겸손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신앙인들도 친구 같은 이웃이 되고, 세상에서도 존경받는 주의 종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