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영화 거부하고 주님만 좇았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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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칼럼] 르네상스-프라 안젤리코

▲프라 안젤리코.

▲프라 안젤리코.

헨델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때때로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2부의 “모욕받으셨네” 부분에는 그가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메시아 악보 마지막에는 하이든이나 바흐처럼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라고 기록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안젤리코도 비슷한 길을 걸어갔던 화가요 수도사였다. 그는 1395년에 피렌체에서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비키오(Vicchi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해인 1417년에 형 베네데토와 함께 피렌체로 와서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기서 형은 필사가로 일했고, 동생은 채색 화가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젤리코는 20살이 되던 해인 1420년에 피렌체 시내의 북쪽, 피에솔레(Fiesole)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기도 생활 중에 틈틈이 그림을 그렸는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피에솔레의 조반니(Giovanni da Fiesole)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417년, 산니꼴로 바리(San Niccolo di Bari)의 형제회에 가입했고, 그 다음 해에 산 스테판노 알 폰테(San Stefano al ponte)의 제단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도사로 헌신하기 이전에도 이미 화가로 활동하였음을 알게 된다.

안젤리코를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라고 하는데, 프라(Fra)는 수도사(Frate)의 약자다. 안젤리코는 이미 알려진 사람인데도 굳이 수도사라는 신분을 이름 앞에 붙인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사회에서 성도라는 신분을 숨기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이다. 더 나아가서 그의 이름이 안젤리코가 된 것은 당시 시인이자 학자이었던 도미니코 신부 코렐라가 그를 천사 같은 화가로 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동료들로부터 천사라 불릴 정도로 주님의 은혜로 흠뻑 적심을 받은 수도사였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평론, 미술 열전을 쓴 화가이자 문필가인 바사리(Vasari, 1511-1574)에 의하면, 그는 기도하지 않고는 절대로 붓을 잡지 않았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그릴 때는 언제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바사리는 미술 열전에서 르네상스에 관련된 화가나 건축가나 조각가 200여 명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 많은 천재 가운데 안젤리코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신앙심 깊은 수도사였는데, 화가로서의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는 사람은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유명했지만 삶은 늘 청렴했다. 본래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였기에 칭송받는 일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일을 기뻐했다. 성인 같은 삶을 산 화가요 수도사였다.

그는 1445년, 인문학자로 뛰어난 교황 니콜라오 5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그는 로마에서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궁내의 경당, 그리고 교황의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교황이 겸손하고 신심이 뛰어난 그를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자, 그는 간곡하게 사양하는 대신 친구를 추천했다. 대주교란 추기경을 의미한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그 자리를 조카에서 주기 위해 8백억(현 시세)을 후원해야 했는데, 안젤리코는 거저 굴러온 행운을 자신이 받아야 할 직분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사양했다.

장군이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처럼, 추기경이 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지는데, 우선 빨간 모자와 빨간 옷을 입게 된다. 현재도 추기경은 로마시의 공적 모임이 있을 때 시장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그처럼 대우를 받는 높은 자리인데, 안젤리코는 그 자리를 완곡하게 사양했다. 이유는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주님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1450년 피렌체로 돌아가 2년 동안 피에솔레 수도원장을 역임했고, 1453년에 로마로 가서 그곳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유해가 산타 마리아 델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되었고, 1984년에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더 이상 사양할 수 없도록.

그는 화가로서 자신이 체험한 예수를 충실하게 그림으로 전하려고 힘을 다했다. 종교적 영성을 프레스코화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려 했다.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 명암법, 단축법, 원근법에 충실했다. 걸작으로는 수태고지가 있다. 천사는 양손을 포개서 가슴에 얹고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전하는데, 마리아가 놀라고 당황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그렸다. 마리아 역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천사의 방문을 겸손하게 맞이하는 모습이다. 마리아의 집은 코린트 양식의 주두로 표현했고, 뒤에는 이오니아식 주두인데, 이것은 수태고지가 이루어진 곳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 나사렛 마리아의 집인 동시에 수도원임을 의미하는 이중성을 묘사한다. 이를 통해 수도자들에게 순명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제자로는 파브리아노와 도메니코 미켈리노가 있다. 그리고 풍경과 구성은 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을 경험한 인생은 정직을 추구한다. 언젠가 그분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안젤리코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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