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화 속 인물들에게 표정이 없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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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칼럼] 르네상스-페루지노

▲페루지노.

▲페루지노.

화가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3)는 그의 제자가 라파엘로라는 것 때문에 유명하다. 그는 라파엘로를 11살 때부터 4년 동안 가르쳤다. 그러나 동시대인은 페루지노를 15세기 마지막 10년부터 16세기 초까지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이탈리아 미술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했다. 당대의 미술 평론가 바사리(Vasari)도 그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을 크게 기쁘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에서 출생했는데,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했다고 한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화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나 똑똑한 청년들을 후원했고 공방을 통해 스타들이 발굴됐기에, 화가 지망생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다. 시골 출신 미켈란젤로 역시 메디치 가문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지원했다. 그를 양자로 들여 교육시켜 위대한 예술가가 되도록 했는데, 이런 사례는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줬다. 이 시대 사람들이 갑자기 스타가 됨으로 젊은이들의 로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페루자에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꿈에 그리던 피렌체로 가서 베로키오 공방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회화와 조각, 그리고 금세공을 배웠다. 베로키오는 두오모 성당 곁에 있는 세례당 문을 새로 장식하려고 화가를 선정할 때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힌 대단한 화가요 조각가였다. 그런 최고의 화가가 운영하는 공방에 들어간 것은 행운이었다. 거기서 철저하게 배운 후 드디어 1472년에 피렌체의 정식 화가 단체인 길드(Compagnia San Luca)에 가입할 수 있었다.

도상학적으로 볼 때, 그는 베로키오와 피에로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배웠을 것으로 본다. 당시 화가들의 꿈은 교황에게 지명돼 바티칸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일단 교황의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롭고, 최고의 화가임을 객관적으로 증거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밀라노의 라스칼라(Teatro La Scala) 극장 같은 최고의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개런티가 달라지고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는데, 1481년 교황 식스토 4세의 부름을 받아 시스틴 경당에 그의 대표작인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La consegna della a Pietra)라는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이에 만족한 교황은 그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뒷벽까지 그리게 했다. 당시 화가들은 초상화보다 종교화를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후자가 수입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성당의 벽면에 성서의 주제로 그림을 채우는 데는 보통 몇 년씩 걸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더구나 성당의 예배실 벽에 성서의 주제로 그리는 것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당시 시민들은 대부분 라틴어를 몰랐고, 라틴어로 하는 강론은 더더욱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틴어는 이미 수백년 전에 사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들이 평신도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했다. 그 일에 페루지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많은 화가들이 그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는데, 심지어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에서까지 왔다. 1485년에는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페루자에서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루카 환첼리(Luca Fancelli)의 딸과 결혼도 했다. 그 후부터 그는 자신이 그리는 마돈나의 모습을 아내의 얼굴로 대신했다.

그는 피렌체와 페루자에 공방을 운영했는데 보디첼리, 리피,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같은 당대 기라성같은 화가들의 작업장보다 명성이 더 높았다. 그 정도로 성공했으면 일을 좀 줄이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도 가질 만한데, 그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고로 그가 그린 그림들을 찾아보면 화가 중에서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밀라노, 루카, 크레모나, 베네치아, 볼로냐, 페라라를 순례하면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주문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대 시민들의 성향에 맞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그림은 형식미, 밝은 색감, 빛과 명암의 응용, 그리고 원근법에 충실했다.

그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활동한 화가였다. 유행이나 인기는 쉽게 변하는 속성이 있다. 콩나물이 시루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듯, 세상의 패턴도 빠른 속도로 변한다. 이미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라파엘로 같은 천재가 일어나 활동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변화의 추이를 외면하고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했다. 고로 그에 대한 비평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형식주의, 반복성, 위선에 빠져 있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인기에 편승해 사방에서 들어오는 많은 주문을 빠르게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창조적 그림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바티칸을 장식하도록 했다. 즉 자비와 정의의 그리스도를 그리도록 했는데, 교황은 중도에 작업을 멈추게 했다. 페루지노의 그림을 좋아했던 교황 식스토 4세가 자신의 삼촌이었는데도 말이다. 당시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었기에, 기왕이면 하는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움브리아의 작은 도시들에서는 그의 인기가 여전했기에, 그는 말년에는 페루지아 인근의 시골에서 작업을 했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들이 표정이 없는 이유에 대해, 바사리는 그의 성격과 삶에 원인을 두었다. 그런데 혹자는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재능이 있어 인정은 받았으나 신앙은 없었다고 한다. 영혼의 불멸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고, 종교에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돈에만 목적을 두었다고 했다. 그런 정서적 무관심 때문에 작중 인물들을 무표정하게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고백이 아니라 도상학적 설명이니, 본인이 침묵하는 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놀라운 것은, 화가가 신앙과 무관하게 재능만으로 성경의 내용을 그릴 수 있고 뭇사람들을 감동케 한다는 점이다. 그런 건 일종의 예술적 기만은 아닐까? 성당의 벽화를 아름답게 그린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 중 그런 화가들이 얼마나 많을까? 라파엘로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은 것을 매독 때문이라고도 하니…….

이탈리아 중부, 트라시메노(trasimeno) 호수, 그곳은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다. 즉 기원전 217년, 제2차 포에니 전투에서 집정관 풀라미니우스가 이끈 로마 군단이 한니발에게 전멸하다시피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페루지노는 바로 그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 폰티냐노(Fontignano)에서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523년, 75세의 나이로.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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