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내 말만 들었더라도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태복음 27:19, 24-25)”.
이제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이 시대에도 빌라도와 같은 잔인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실로 안타깝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는 것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골고다 언덕에서 피, 눈물, 땀을 모두 쏟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정말 가슴이 먹먹하고 그저 눈물만 쏟을 뿐입니다.
오늘 제목인 ‘빌라도’는 로마 제국 황제 티베리우스(디베료 가이사)가 유대에 파견한 총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선고한 인물입니다. 라틴어로 폰티우스 필라티우스(Pontius Pilate), 공동번역 성경에는 본디오 빌라도로 표기돼 있고, 가톨릭에서는 본시오 빌라도라고 부릅니다.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을 가진 자’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있었던 듯합니다. 고향은 이탈리아 남부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호전적 성향의 삼니움 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임 기간은 A.D. 26-36년경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집안은 로마 중상층 귀족이자 기사 가문으로, 빌라도는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정했으면서도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한 일 때문에 2천 년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악명 높은 인물로 각인돼 왔고, 이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영원히 악인으로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특히 빌라도는 뛰어난 군인이요 무사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 매우 비겁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필론은 그에 대해 “완고하고 잔인한 성향을 가진 인물로, 유대인 폭동으로 로마에 소환됐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거센 폭동이 일어나자, 빌라도는 직위에서 물러나 로마로 소환돼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A.D. 41년경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명령에 따라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빌라도는 뜻하지 않게 예수를 재판하는 곤란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사실 그가 판단하기에도, 예수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하듯 정치적 모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예수를 무죄로 판결할 경우 가이사의 반역자로 몰려 자칫 정치 생명이 끝장날 위기에 처할 수 있어, 가능하면 직접 예수의 재판에 가담하지 않으려 애썼던 자입니다. 그는 정치인이자 지도자였지만, 실상 재판권을 미루고 직무에 불성실했던 직무유기자요 비겁자이며 기회주의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위협적 존재임을 인식, 예수를 제거해야 자신들의 입지와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해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데려가 처형해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런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모에 말려들었고,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로마에 떠넘기고자 했으며, 빌라도는 그 책임을 다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넘기고자 손을 씻는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실정이 빌라도 때와 너무 비슷합니다.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키거나, 힘 있는 자에 대해선 머뭇거리면서 정상적인 법 집행을 하지 않음은 물론, 책임자로서 사명을 망각하고 남 탓으로 돌리는 모습 등은 빌라도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19절에서 빌라도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옳은 사람인 예수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충고했음에도, 제사장들과 장로, 무리들이 한목소리로 바라바를 달라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니 예수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충고한 아내 이름은, 전승(傳乘)에 의하면 프로쿨라입니다. 프로쿨라는 이집트 콥트 교회와 여기서 분파한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프로쿨라를 성인으로 간주합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ula)이며, 유대교로 개종하고 숨어서 예수를 따르던 성도였다고 합니다.
24절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라는 말씀은, 유월절 무렵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빌라도가 용기를 잃었음을 뜻합니다. 손을 씻은 행위는 유대인의 관습 중 하나로, 어떤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손을 씻음으로써, 빌라도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25절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지겠다고 말합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이 이들의 말에 대한 성취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이후 2천 년 동안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됐음을 우리도 뼈저리게 새겨야 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 죄목’ 대신(마 26:64-66), 간교하게도 민중 선동과 납세 거부 등 주로 ‘정치적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소합니다(눅 23:2).
빌라도는 이러한 간계와 예수님의 무죄를 깨닫고 있었고 아내의 전갈을 통해 이를 확신했지만,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작된 민의와 민란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라바를 석방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예수님 대신 석방된 바라바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 소요를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열심당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예수와 바라바 중 하나를 놓아주기로 택할 경우 당연히 예수를 택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생각과 종교 지도자들, 민중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교묘한 꼼수에 넘어간 민중이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소리 높여 함성을 지른 것입니다. 총독인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정의로운 판결을 하는 대신 민란이 두려워 예수님을 저들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손 씻는 것으로는 씻을 수 없는 잘못된 판결을 한 자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됐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예배드릴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비굴한 이름 빌라도가 비참하게 소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시대나 2천 년 지난 이 시대나, 인간들의 완악함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과 선배들의 교훈을 알고 있지만 권력과 탐심 때문에, 그리고 지은 죄를 덮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만행의 끝에는 비참한 최후가 기다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변명하며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자신은 오롯이 지은 죄에 대하여 모르쇠로 일관하며, 같은 국민으로서 법과 질서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공부한 법을 교묘하게 사용해 죄를 짓습니다. 탄핵 정국이 끝나면, 법을 교묘히 이용해 백성들에게 숱한 거짓말과 사기, 죄를 덮어씌우고 백성들의 눈을 가리며 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을 색출해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내 프로쿨라의 말을 들었더라면 공의로운 재판관이자 훌륭한 정치 지도자로 지금까지 추앙받았을 텐데,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정치적 입지만 생각해 구세주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게 해 백성들과 이방 모든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제공하며 지금까지 악인으로 입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차라리 총독이 되기보다 시골에서 평민들처럼 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이뤄졌음을 깨닫고, 빌라도 같은 기회주의자나 비겁한 지도자가 돼선 안 됨을 성경을 통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제사장과 율법학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지도자들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거짓 선지자 놀이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참 크리스천의 모습 없이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외치는 자들이 되어, 성도들에게 분별력을 잃게 해 애가 마를 지경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자신들이 먼저 실천해야 옳은데, 높은 상석에 앉아 아랫사람들을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생업과 사업을 위해 교묘히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교회 안에 우글우글합니다. 심판 때는 어찌 할꼬라는 탄식 소리가 교회 안에서 들리는 듯 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그들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사람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참으로 비굴해 보입니다. 한쪽 말만 듣고 교인들을 왕따시키며 멸시천대는 물론, 잘하고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하며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면 하인 대하듯 하는 추태는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요?
지금 나라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비굴하게 일부 군중들의 함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까 두렵습니다.
빌라도가 아내인 프로쿨라의 말을 경청했다면 인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의 바람과 기대에는 귀를 닫고 오롯이 자신들의 영욕만을 위해 애쓰는 국회의원들의 통렬한 반성과 종교 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 없이 이 나라 미래는 계속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또다시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지도자들이 많아져선 안 될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신앙인들은 그 시대를 공부하며 다시는 이 땅에 기회주의자, 비겁한 자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롭고 공정하고 화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수님의 참 군병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