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深思)’, 자기 발견 위한 첫걸음이자 성찰의 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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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성찰 9] 성찰에 대하여 (2)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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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숙고(深思熟考)’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1) 심사(深思)

먼저 심사(深思)는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깊어야 인격적 존재가 된다. 인격은 생각을 먹고 자란다. 생각을 깊게 하기 위해선 생각의 여건이 필요하다. 번잡하고 혼란한 가운데 생각을 깊게 할 수 없다. 깊은 생각은 홀로 있을 때 가능하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됐다. 외롭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관계에서도 외톨이가 된 자신이 느껴질 때 사람은 외로움을 가진다.

그러나 외로움은 한편으로 자기 성찰의 동기가 된다. 갑자기 들떠 있던 주변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외딴 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심정을 ‘고독이라는 정원’을 설정함으로 대변하고자 했다.

이렇게 생각을 깊이 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을 정리하는 것이다. 자신을 정리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아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라고 주문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

자신을 정리하기 위해, 먼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비움은 모든 심사숙고의 출발이다.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주님도 자신을 비움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비웠기에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으로 낮추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주님이 그러하실진대, 사람인 우리도 자존심이나 욕구나 자기 계획이나 미련이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면 자기를 바라보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가진 것을 버려야 했다. 버림이 비움이다.

여행객은 짐을 많이 가지고 갈 수 없다. 두 손을 꼭 쥔 상태에선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고 가득 찬 그릇에는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은 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무술의 고수는 힘을 비운 사람이다. 힘을 비우니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무서운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비움에 대한 강준민의 철학이 돋보인다.

“빈 곳을 지닌 악기가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피리의 애절한 소리는 텅 빈 공간에서 나옵니다.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도 텅 빈 공간을 통해 울려 퍼집니다. 비움이 있기에 소리가 있고, 비움이 있기에 아름다운 음악이 솟아납니다. 우리도 매일 자신을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매일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으로 빈 곳을 채울 수 있습니다(<믿음이 만든 사람>, 26쪽).”

자기를 비우는 것은 자기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한다. 가득 채워진 공간은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다. 자기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면 자기를 심사(深思)하지 못하고, ‘심사’하지 못하면 성찰하지 못하며, 성찰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한다.

지금 그대 주변을 정리하라. 그리하여 조용한 세계로 자기를 이끌라. 그렇다고 영지주의, 신비주의, 수도원주의자들처럼 현실 세계를 도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 세계를 떠나면 그는 도인이나 수도승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하라고 하신 적이 없으시다.

‘심사’하기 위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자기의 문제를 열거하고 진단하는 일이다. 사람은 자기 문제를 인식하는 데 매우 게으르다. 자기 문제가 훨씬 심각한데도 남의 작은 문제를 지적하는 악습에 길들어 있다.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 문제를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이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냉혹하다. 그 이유는 자기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에 리트머스 종이에 액체를 묻히면, 그 종류에 따라 변하는 종이 색이 매우 신기해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타락한 정도를 측정할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각자에게서 한 방울의 피나 침액을 묻히면 추악한 정도가 색깔로 드러나는 실험지를 발명하기라도 한다면, 조금은 교만함과 완악함과 사악함을 방지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에게 관대한 사람을 체크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기 문제는 뒷전에 두고 남의 문제를 꺼내어 지적하는 나쁜 행동이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자기 문제를 진단하는 사람은 진정한 자기 발견을 시작한 사람이다. 심리학에선 이를 ‘자아 발견’이라 한다. 심리학은 법칙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 이론이긴 하지만, 인간의 타락성을 전제하지 않은 점에서 여러 가설에 해당할 뿐이다. 진정한 자기 발견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타락은 하나님이 떠난 자리에 생긴 깊고 암울한 상처의 자국이다. 이것으로 사람은 완전함을 잃어버렸다. 영원함을 상실했다. 거룩함에서 더러움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타락한 사람은 이제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괜히 강한 척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완벽의 가면을 쓴 존재다.

진정한 자기 발견은 자기가 완벽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은 위험한 환경에 처한다. 연약함을 인정하면 위험이라는 도전을 지혜롭게 회피하고 피할 텐데, 괜히 연약하지 않은 척 자기 과시를 하다 영적 침체나 공허감이나 허탈감이라는 늪에 빠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사람 마음에는 두 가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 면에서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잠 4:23)’이고, 부정적 면에서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인간의 마음은 오직 더럽고 추악한 죄성의 저장소가 되었다. 성경은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진정한 자기 발견은 성경의 이 진술 앞에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회개는 자기 안에 숨겨진 더럽고 추하고 부패한 죄성들을 추적하고 찾아내는 현미경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8)”.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니라(잠 26;24-26)”.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6-18)”.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아, 죄의 짐을 지고 태어난다. (신학적으로 이는 ‘죄의 전가’에 해당한다. 기독교에 있어 전가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 교리는 죄의 영역에 적용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가 신자에게 적용되는 원리로도 설명된다.)

사람에게 선한 부분이 남아 있다든지, 완전히 타락하지 않고 자기 의지는 살아 있다든지 하는 주장은 완전히 허구다. 성경은 그렇게 진술하지 않는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롬 3:23)”.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상)”.

‘심사’는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고, 생각은 자기 발견을 위해 깊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심사’는 자기 발견을 위한 첫걸음이요 성찰의 요체다. 그리스도인이 왜 성찰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발견을 위해서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기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성찰이다. 이 성찰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투시경이다. 아직도 종양이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최더함 박사. ⓒ크투 DB

▲최더함 박사. ⓒ크투 DB

최더함 목사

Th. D., 바로善개혁교회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
마스터스 개혁파총회 임시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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