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판과 판단, 그리고 정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장 1·12·15절)”.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를 하루 앞둔 4월 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에 사람들은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는 “12.3 친위 군사 쿠데타 계획에는 약 5천 명에서 1만 명의 국민 학살계획이 있었다”며 “제주 4.3 계엄에 의한 군정을 꿈꾸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당에서는 즉각 “있지도 않은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이라며 “법적 조치에 착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인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다 아실 것입니다. 심지어 허위사실 유포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저런 발언을 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는 한 사람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로, 엄중한 처벌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자꾸 법원에서 괜찮다고 해주니, 갈수록 더 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이제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참을 말하는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지에 올라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2심 법원 판단대로 ‘인식·의식·기억의 영역’에서 한 발언이라 괜찮은 걸까요?
오늘 제목은 ‘비판과 판단, 그리고 정죄’입니다. 뜻을 알아볼까요? 비판(批判)이란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함”입니다. 판단(判斷)은 “일정한 논리나 기준에 따라 사물의 가치와 관계를 결정함”, 정죄(定罪)는 “죄가 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욥기 4장 19-20절)”.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위로는 설득이 아니라 공감에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확고한 생각이 이미 뇌에 장착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이끌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닌 설득인데, 심약할 땐 그 설득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욥을 찾아온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7일 밤낮 말없이 지냈지만, 욥 안에 있었던 울분과 억울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치유를 향한 첫 발자국을 겨우 떼었는데, 친구인 엘리바스가 욥의 토설이 잘못되었다고 욥을 설득하려 합니다. 이는 이론은 옳았을지 모르나 방법론상 지혜롭지 못합니다.
욥을 위로한답시고 오히려 욥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인내’라고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대한민국 현실은 양극단적 논리가 판을 치고 있어 상대방 주장에는 귀를 막고, 나만 옳다는 고집으로 이웃과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셔서 죄마저 지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 것이고,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거나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거나입니다. 이것이 삶의 실존이자 갱생의 원리가 아닐까요.
욥은 그동안 나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신실하게 살아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넓고 깊고 광대한 하나님 나라를 체험케 하시기 위해 그를 고난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장 1절)”는 경고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경향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환경과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 것일까요? 비판과 정죄는 종종 습관처럼 반복되는데, 이 역시 인간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참과 거짓,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의 약점이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파괴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앙인들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반응하고 그들의 단점이나 결점을 드러내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보지 못할까요?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질과 관계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이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불안이나 결점을 숨기려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특히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입니다.
이어 “외식하는 자여 먼저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5절)”는 말씀을 봅시다. 우리는 남의 결점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권의 옳지 못한 처사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4월 4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정국은 또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간의 갈등으로 나라는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나아가고 있어, 매우 안타까울 뿐입니다.
‘갈등’은 칡 갈 자(葛)와 등나무 등 자(藤)로 되어 있습니다. “일이나 사정이 서로 칡이나 등나무처럼 복잡하게 뒤얽혀 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으면 갈등이 심해질 뿐입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던 과정은 참으로 해괴한 논리와 거짓된 음모뿐이었는데, 국회 권력에 힘을 잃고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사법부의 모습에 참으로 한심스러움을 넘어 구역질이 나옵니다. 약한 사람들 편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양심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법을 교묘히 이용해 애매모호한 결론으로 악의 세력에 굴복해 판결하는 모습이 참으로 슬픕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비만 오면 산간 계곡에 폭포 같은 하수가 떨어져 그 앞의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 넘쳐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공법과 정의’가 이처럼 어디서나 거침없이 흘러 넘치게 하라는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편에서 판단해 나라를 더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빌라도의 비겁함이 문득 떠올라, 마음이 착잡합니다.
존경받아야 할 헌법재판소는 소명을 다하지 못한 채 여론과 권력, 그리고 협박에 몸을 숙이며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고 자신있게 아뢰었던 임진왜란 당시 참으로 장엄하고 위대했던 이순신 장군 같은 재판관은 어디 없을까요?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음에도, 왕 앞에서 굴하지 않고 소신껏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법관들이 어떤 걸림돌 때문에 쉽게 사명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더니, 권력과 물질의 유혹 앞에, 그리고 공갈과 협박 앞에 몸을 낮추는 모습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나 을사오적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판관 포청천’처럼 정의롭고 공의로운 자세로, 사명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해 억울한 백성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물으셨을 때, 솔로몬 왕 부귀영화나 장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억울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는 물론, 부귀영화까지 허락하셨음을 벌써 잊으셨나요?
중직을 맡은 기독교 신앙인들도 하나님이나 정의가 아닌, 자신의 당을 위해 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당 대표가 수많은 죄를 지어도 아무 말 못한 채 그들과 한패가 되어버린 어리석은 모습은 이제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늘 이웃과 상대방을 적으로만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는 문화로 바뀌어, 뜨거운 관심으로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길 바랍니다. 신앙인들 역시 공의롭고 정의롭게, 하나님과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행동하는 귀한 사명자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