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의 신앙시, 기독 시인 17] 윤동주를 닮고 싶었던 시인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근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정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시인은 경기도(현 인천광역시) 옹진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외과를 나오고, 중앙일보 기자를 지냈다. 황해도 피난민 가정 3남 4녀 중 막내 아들이었다.
윤동주 시인을 닮고 싶어했고 ‘윤동주문학상’을 받은 기형도 시인은, 1970-1980년 동시대 문학 청년들의 탐구 대상이었다.
당시 다둥이 가정 막내들의 삶은 유사했다. 부친들은 회갑을 전후해 뇌졸중이 찾아왔다. 기형도 시인 부친도 196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기 시인 만 9세 때였다. 7남매 막내였던 필자의 부친도 필자의 만 9세 때 소위 중풍(고혈압 증세)으로 쓰러지셨다.
광명시에 살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시장에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기형도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유년 풍경들이 옛 광명 소하리 인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유다.
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이 된 누나 기향도 씨는 동생을 추억하며, 생전 기 시인은 국 속의 고기를 자신이 먹지 않고 몰래 어머니 그릇에 옮겨 놓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했다.
그런 이유로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은 광명시내와 광명 KTX역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7남매의 막내요 유년(만 9세) 시절 부친이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기형도 문학관이 개원했을 때 광명 KTX역 앞에 잠시 살면서 습관적으로 기형도 문학관을 찾곤 했다.
기자 시절, 기형도 시인은 심야 영화를 보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 때였다. 이 기가 막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기 시인의 요절은 그의 묘지가 문학 청년들의 순례 장소가 된 이유가 되었다.
기형도 시인에 대해 서울대 김현 교수(평론가)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했다. 평론가 정과리는 이 말에 동의하면서 “죽은 기형도가 살아 있는 어떤 시인보다도 더 뜨거운 현재형으로 타오르고 있다”고 했다.
기형도 시인은 일상의 언어로 현실의 참혹함과 생채기를 담담히 그대로 드러낸다. 숭실대학교 국문학자 엄경희는 기형도의 시가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확실한 절망을 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고 했다.
“사람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히 9:27)”.
프랑스 파리 동쪽 20구에 있는1803년 나폴레옹 시대 만들어진 유명인들의 묘지 페르 라세즈(Cimetière du Père-Lachaise)에 가 보면 음악가 쇼팽, 작가 오스카 와일드, 철학자 마르셀 푸르스트, 시인 아폴리네르, 작가 발자크, ‘카르멘’의 비제, 화가 모딜리아니, 배우 이브 몽땅, 가수 마리아 칼라스,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등의 무덤이 보인다.
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끈 묘지는 놀랍게도 오스카 와일드의 묘지였다. 그의 묘지에는 입술을 맞추려는 방문객들로 인해 접근 통제의 유리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리 도심임에도 화장장도 묘지와 함께 붙어 있다. 비 오는 날 쇼팽의 묘지를 보고 싶어 찾아갔던 필자는 삶의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덕영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신학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