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상을 품고 사는 삶
남편과 함께 튀르키예(터키) 여행을 하게 됐다. 여기저기서 온 낯선 사람들과 팀을 이뤄 7박 9일을 함께하는 일정인데, 모인 사람들 연령층이 다양했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도 있었고, 가장 나이 많은 분들은 60대 후반 커플이었다.
그 중 은퇴 후 혼자 여행을 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1년 중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고 했다. 집보다 여행을 좋아하고 집에 가면 스트레스가 쌓여 얼른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그 분의 말은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로도 들렸지만, 왠지 처량하게 들렸다.
혹시나 가족 관계가 편치 않아 그 고통과 외로움을 여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잊어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이 정말로 보듬어야 하는 것은 부딪쳐야 하는 여행이 아닌, 현실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벤트나 여행은 잠시 쉬어갈 여유를 주고, 그 강렬하고 즐거웠던 잠깐의 기억들이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이벤트만 하고 여행만 하면서 살 순 없는 것이 우리 삶이다.
필자만 해도 여행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벗어놓은 산더미 같은 빨래와 마당에 더 이상 깎기 힘들 정도로 자란 풀들, 해야 하는 밀린 업무들, 당면한 막내 딸의 수술 일정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일상을 해내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일상을 나의 것이라 품으며 사는 태도가 건강하다. 그렇기에 이벤트나 여행을 위해 일상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잘 살아나가기 위해 여행을 적절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한 아내가 죽을 병에 걸려 6개월간 병원에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 시간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남편은 시인이었다. ‘시인’ 나태주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표현한다.
“난 또 다르게 생각해요. 그것도 내 인생이다. 감옥 생활을 해도 내 인생이다. 소나기에 흠뻑 젖고 되는 거 하나 없는 날도, 그 날이 내 날이다. 그 날을 보듬어줘야 다음 날이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는 휘파람 불듯 말을 이었다. “산다는 건… 말이지요. 매우 비참한 가운데 명랑한 거예요.”
어렵고 힘든 삶도 나의 삶이라면, 회피하고 도망가기보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나와 가족을 함께 격려하고 고민하며 함께 보듬어주면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쾌락이 아닌 삶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최근 배우 김수현 씨가 많은 비난을 받는 이유도, 함께한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과 아픔을 겪을 때 함께 보듬어주지 못하고 자신의 명성이나 쾌락만 좇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아주 총명하고 아름다운 외모의 이지선 학생은 큰 교통사고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그 모든 아픔과 잃어버린 과거에 연연해 현재의 삶을 품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아프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과 싸우고, 또 그 현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삶을 살았기에, 지금의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지선 ‘교수’는 사고를 당한 날이 ‘제2의 생일’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됐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담 중 내담자가 변하지 않는 가족의 모습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엄마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자리를 지켜 나가길래 그분에게 말했다. “당신은 힘들게 하는 남편 또는 자녀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하신 거예요. 그러니 이제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고, ‘이 삶은 내가 선택했어’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나의 고통이 외부 환경 때문에 온다고 생각하면, 나의 고통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나는 늘 희생자가 되고, 어쩔 수 없이 남의 삶을 사는 자가 된다. 그런데 내가 겪고 있는 고통도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라고 여길 때, 우리는 거기서 힘을 낼 수 있다. 좋든 싫든 그것만이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도서에는 “사람이 죽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힘들다고 삶을 포기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자. 오늘의 슬픔은 가까운 날의 기쁨을 예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의 어려움은 내일의 부요함을 감사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도구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고통을 경험할 때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삶의 이해가 더 풍성해지니, 그것을 성장의 도구로 여겨 보자.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며, 이웃까지 품는 사람이 되어간다.
일상의 행복이 주는 소중함을 놓지 않을 때 간혹 경험하는 여행도 즐겁고, 예기치 않은 만남에 감사할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까지 나의 삶에 함께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자.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모두 어우러져 나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미진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부학장
호주 한인 생명의 전화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