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즐겼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주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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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칼럼] 르네상스-필리포 리피

▲마리아와 어린 예수.

▲마리아와 어린 예수.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 1406-1469)는 1406년 피렌체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출산 중 사망했고, 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그는 형과 함께 고모에게 맡겨졌다. 그 후 1414년 8살이 되었을 때, 형과 함께 인근 카르미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1년간의 수련기를 거치고 15살에 수녀원에서 서약하고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그는 그림에 취미가 있었기에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하며 데생 연습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재능의 탁월함이 수도원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15세가 되던 1421년부터 ‘수도사 필리포’(Fra Filippo Lippo)로 불리게 되었다.

18세가 됐을 때인 1424년, 천재 화가 마사초(Massacio)가 브랑카치(Brancacci) 교회에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그의 협력자로 작업하였고, 31세이던 1437년에 피렌체에서 공방을 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고, 메디치 궁정으로부터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피렌체에서 당시의 실권자 메디치 가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화가들의 로망이자 꿈이었다. 당시 유럽 최고의 부자요, 통치자요, 예술을 사랑하고 아낌없이 후원하는 자의 괴임을 받는다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서 생활의 안정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으로 먹고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필리포 리피에게는 이제 고난의 계절이 지나가고 명예와 돈과 여유가 찾아온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화가 중에서 말이다.

예술가들이 당대에 인정받게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 고흐는 죽기 전까지 수많은 그림을 그렸으나, 생전에 팔린 그림은 단 한 점뿐이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사역하는 후배의 전언에 의하면, 파리에 한국 화가들이 400여 명 있는데, 순수하게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그럴 정도로 예술가들이 당대에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신의 작품이 제값을 받고 팔리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런 면에서 필리포 리피 같은 화가는 복된 예술가다. 그가 당대 피렌체의 통치자요, 예술을 사랑하고 통큰 후원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주변국들에도 이 화가에 대한 명성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통해 권력자에게 다가가려는 자들의 그림 주문도 폭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필리포 리피는 프라토와 산타 마르게리타 수녀원에서 사역했는데, 전해지는 얘기로는 수녀원장에게 모델이 되어 줄 수녀를 선택해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당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장소는 주로 성당이었고 주제는 예수님과 마리아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델로 연결된 사람이 당시 20세의 수녀로 아름다운 루크레치아 부티(Lucrezia Buti)였다. 그녀는 몹시 가난하여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오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젊은 남녀 사이에는 예측할 수 없는 불꽃이 튀는 법이다. 두 사람은 서원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모델과 화가라는 관계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필리포 리피는 종교적 행렬에 줄지어 가던 중 그녀를 납치해, 준비한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 싶다. 그래서 첫 아들 필리피노, 이어서 딸 알렉산드리아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약을 한 자들이었기에 파계자로 치부됐다. 그런 중에 필리포 리피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일에 휘말려 체포됐고, 재판을 받고 고문도 당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던 피렌체의 실력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교황 비오 2세에게 부탁해, 그가 수도사의 서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직 사제 겸 화가와 수녀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 필리피노는 15세기 말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됐다. 목숨을 건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다 싶다.

필리포 리피는 15세기 후반 가장 유명한 피렌체 화가 중 한 사람이 됐고, 르네상스의 유명한 화가 산드로 보디첼리(Sandro Botticelli)는 필리포 리피에게 훈련받은 제자다. 필리포는 선화와 채색화의 기초와 우아한 포즈를 취하는 인물로 구성된 내러티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림에 적용했다.

당시의 평론가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이태리의 동부 해안 도시 안코나(Ancona)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해적 무어인들에게 잡혀, 바르바리(북아프리카)에 노예로 끌려가 18개월 동안 머물다가 해적(무어인) 두목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풀려났다고 한다.

그는 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동적인 삶, 즉 모험적인 삶을 즐긴 화가였다. 그는 제2의 고향 플라토(Plato)의 대성당 제대석에 세례자 요한과 성 스테파노의 장례식 그림을 그렸다.

1466-1469년에 스폴레토(Spoleto)의 오페라 델 두오모(Opera del Dumo)에 성모 이야기를 프레스코로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고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프레스코화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그의 협력자들에 의해 완성됐다.

그는 마사초를 잇는 화가로, 구성과 다양성, 채색에서 뛰어났다. 풀랑드로 회화를 포함하여 더 넓은 영역으로 발전시켰는데, 날씬하고 역동적인 포즈, 리드미컬한 윤곽선, 그리고 성모에 대한 그림에서 생동감 있고 엄숙하고 우아한 움직임,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실주의 포즈를 취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남긴 그림으로 증거하고 있다. 5백 년이 넘도록.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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