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휠체어 탄 목사’가 꼭 전하고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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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승의 러브레터] 장애인은 선교 대상 아닌, 선교하는 동역자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오랜만에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장애인의 날(매년 4월 20일)이 되어 집필 요청을 받고 이제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구나 말이지요.

사람은 이렇게 누군가 생각나게 해주는 존재들로 엮여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동시에 제게 주신 것에 대하여, 그리고 제 역할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은 제가 가진 장애,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볼까요?

여러분은 휠체어를 탄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시나요? 보셨다면, 그들과 얼마나 많이 같은 자리에서 교류해 보셨나요?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이 수업을 듣고, 같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나요? 아니면 저 멀리에서 본 것은 아닌지요?

지난주 저희 교회는 한 장애를 가진 청년이 비장애인 청년과 함께 봉헌 찬양을 불렀습니다. 음정 좀 틀리면 어떤가요. 함께인 것이 중요하지요.

이렇게 함께함이 싫은 사람은 없을겁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외부에 나갈수록 긍정적 영향을 받을 것에는 모두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휠체어를 사용하는데, 외부에 나갈수록 우울해진다면 나가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오성은·김한성의 연구에서는 핸드폰 GPS 데이터를 활용해 장애인들의 일평균 이동거리를 측정했습니다. 이동거리가 길어질수록 차별 경험이 많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우울증상이 증가했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많이 외출하는 것이 좋은 일인데, 왜 우울해졌을까요?

장애인주일을 맞아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꼭 점검해야 할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류 목사가 비장애인들과 비탈길에서 이동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류 목사가 비장애인들과 비탈길에서 이동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1. 사람들은 ‘더불어, 함께, 같이’라는 구호를 참 많이 외칩니다. 교회는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정작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분리’를 선택합니다. 분리가 안전해 보이고, 어쩌면 편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분리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할 때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함께해야 할 구성원들조차 효율성 혹은 편의성을 기준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2.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동등한 기회와 가치가 배제되거나 분리돼선 안 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여전히 동등한 기회에서 배제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1980년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척수마비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가진 저를 사회에서는 ‘중증장애인’으로 분류합니다.

그때는 시설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행복했던 기억이 많았던 것은, 비장애인들과 평범하게 살아갔던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휠체어를 타건 목발을 딛건, 비장애인들과 함께 운동장에 어떻게든 있게 해주셨던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이후 중·고등학교 때 반에 남아 있어야 했던 체육시간은 즐겁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대 이후 여러 장애인 시설들이 생겨났습니다. 필요한 시설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설은 사회화 과정의 짧은 통로여야지, 목적지여서는 안 됩니다. 사회 구성원인 존재들을 시설 안에 두는 것은 오히려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방증합니다.

▲류한승 목사가 유아 시절 목발을 짚고 재활하던 모습. ⓒ류한승 목사

▲류한승 목사가 유아 시절 목발을 짚고 재활하던 모습. ⓒ류한승 목사

3. 더 큰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나 장애인이 포함된 구성 주체 모두 차별 인식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차별 감수성이 낮아진다는 것은 오히려 차별이 깊숙이 스며들어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김승섭 교수의 이야기는, 단지 차별 인식과 경험을 통계 데이터로만 보는 것의 위험성과, 숫자 너머에서 혼자가 되어버린 존재들로 발걸음을 향하신 예수님의 가치를 돌아보게 합니다.

차별 인지 경험은 대부분 사회에서 이뤄진다는 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예 분리되고 격리된 상태, 그리고 이 상태가 지속된 기간이 길수록 오히려 차별 경험도는 줄어들고, 차별 인식도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사회 활동에 참여할수록 차별 경험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우울감도 늘어난다는 보고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류 목사는 초등학생 시절 비교적 자유롭게 바깥 활동을 했다고 한다. ⓒ류한승 목사

▲류 목사는 초등학생 시절 비교적 자유롭게 바깥 활동을 했다고 한다. ⓒ류한승 목사

4. 그렇다면 차별 경험이 생기지 않도록 계속 분리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 조금만 불편하면 분리시키는 사회로 만들고, 장애인 당사자나 주변인 모두를 불건강하게 만들게 됩니다.

운동을 할 곳을 찾다가, 휠체어 배드민턴을 치기 위해 지자체가 운영하는 배드민턴장에 간 일이 있습니다. 화요일에는 휠체어 배드민턴 동호회 분들과, 목요일에는 저희 교회 청년들과 갔습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배드민턴을 치러 간 것이지요.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막혔습니다. 화요일에는 장애인 배려 코트로 갔는데, 그곳에선 비장애인들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빈 코트에서 치겠다고 했더니, 장애인은 네 명 이상 와야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아가 장애인은 화·목·토 정해진 시간에만 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럼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느냐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빈 코트에서 기다렸다가 친다는 것입니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에 항의했습니다. 저는 용어부터 수정했습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입니다.” 대상의 평범성을 무시하고 일반인과 비일반인으로 규정지으면, 장애인은 언제나 ‘평범한 일반적 그라운드’에서 ‘특별한, 그러나 시설화된 그라운드’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언제나 ‘장애인은 장애인들끼리,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들끼리’로 구조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이 언제나 특혜의 대상처럼, 장애인들에게는 언제나 차별받는 대상처럼 이중 감정을 갖게 합니다. 결국 함께 살아야 할 사회는 꼬일수 밖에요.

저는 용어를 수정한 뒤, 같은 조건으로 대우해 달라고 했습니다. 먼저 와서 기다렸다가 빈 코트에서 칠 수 있도록, 그리고 몇 명이 오건 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되면 무조건 목요일에도 나가서 치기로 했습니다.

이는 저 같은 장애인이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해서 생긴 오류라고 믿습니다. 나쁜 생각이 아니라 장애인을 접해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관리 측면에서만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지금은 저희 동네에서 저와 함께 간 친구들은 언제든 배드민턴을 칠 수 있습니다.

▲류 목사가 비장애인들과 비탈길에서 이동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류 목사가 비장애인들과 비탈길에서 이동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5. 이렇게 밖에만 나가도, 작은 부분에서부터 쉽게 차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자주 나가려고 했습니다. 국립재활병원에서 휠체어 장애인에게 스키 체험을 하는데, 숫자가 얼마 안 되니 동참해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좋다고 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스키장에 갔는데, 정말 휠체어용 스키가 따로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도움을 받으면, 스키장 곤돌라에도 휠체어용 스키를 탄 채로 탑승이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는 길이었습니다.

시설은 만들어져 있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휠체어가 들어가기 협소할 뿐 아니라, 아예 길이 울퉁불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 선생님들 두세 분이 들고서, 옆길을 통해 곤돌라에 탔습니다.

선생님들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려, 속으로 미안해 죽을 뻔했습니다. 가는 내내 “미안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꼭 가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같이 가기 미안해서 오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서로 토론을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일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특별한 시설’은 있는데, 그곳까지 가는 ‘평범한 길’이 없는 이야기들 말이지요. 마치 비기독교인들에게 교회가 ‘열린 교회 닫힌 문’처럼 인식되듯 말입니다.

6.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헬스 같은 운동을 하려면, 장애인복지관에서나 겨우 할 수 있습니다.

지차체가 운영하는 곳들은 대부분 오후 5시에 문을 닫으니,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거의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장애인들의 건강 문제로도 연결됩니다. 병이 생기면 그제서야 특별한 시설, 병원 같은 곳에서 치료에만 의지해야 하니 말이지요.

저상버스도 얼마 없지만,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 가야 할 평범한 길들은 수동 휠체어로 가기엔 산이나 강처럼 멀고 멉니다. 그러니 결국 자가 차량으로 운전해 다니거나,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특정 공간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려면, 손의 힘이 일정 이상 나오지 않아야 지원을 받습니다. 그럼 수동 휠체어로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활동을 도와줄 사람이 필수적이거나 차가 있어야 합니다.

휠체어를 혼자서 쉽게 넣고 빼려면 가벼운 휠체어를 사야 하는데, 가격은 500만 원이 훌쩍 넘습니다. 그런 휠체어를 혼자서 넣고 빼려면 차가 커야 하는데, 2,000cc 이상은 정부 지원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장애로 인한 추가요금들입니다.

▲바깥에서 류 목사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바깥에서 류 목사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 ⓒ류한승 목사

7.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휠체어 전용좌석은 있습니다.

여전히 극장을 가도 가장 앞자리에서 목을 뻣뻣하게 들고 봐야 합니다. 저는 같이 간 사람들에게 같이 고개 들고 보자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같이 간 사람들은 좋은 자리로 예매해 주고, 저 혼자 앞에서 영화를 봅니다.

뮤지컬을 볼 때도 자리를 선택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왜 계단 대신 슬로프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왜 중간중간 휠체어가 앉을 자리를 넣지 않았을까요?

비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차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인들의 집합소인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대학들도 휠체어 자리는 여전히 가장 앞자리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한 세 자리 정도요.

이런 시스템과 구조는 결국 장애인 혜택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방식, 즉 경제 논리로만 풀게 됩니다. 여전히 일할 기회는 없는데, 일부 감면으로 엄청난 혜택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니 사회는 “장애인들은 혜택을 받잖아”라면서 차별 인식이 없어지고, 장애인들은 그냥 혼자 다니거나 불편한 자리는 피해 버리니, 차별 인식이 없어질 수밖에요.

8. 결국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함께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극장에서 같이 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스키장을 보다 쉽게 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동네 산책길을 같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배드릴 때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헬스장에서 장애인과 같이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 없이는, 매번 반복되는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회로, 시혜자와 수혜자의 담장 논리로 풀어갈 것입니다.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9. ‘함께’라는 논리로 만들어진 시설화된 제도가 있습니다. 활동보조인 제도입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한국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듣지 않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면서, 오히려 가족과 가장 친밀한 사람들의 관계에 무관심한지를 보여주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현재 활동보조 서비스는 대부분 공공기관이나 민간기관을 통해 제공됩니다. 그러나 이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직접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가족은 활동보조인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현재 개선돼 최중증의 경우 인정됨).

신변의 모든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장애인의 의사를 묻지 않는 점은 심각한 인권 침해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제한적 자유는 곧 자기 결정권 침해로, 그리고 심각한 차별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간과한 이유를 물으면, 보통 두 가지를 듭니다. 첫째는 경제 활성화, 둘째는 가족들에 의한 학대 사고 예방 차원.

첫째 경제적 측면이란, 장애인 당사자가 소비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경제 논리의 오류입니다. 물건을 파는데 소비자나 고객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기업은 나쁜 기업입니다.

둘째는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심각한 인권 침해이면서, 활동에 초점을 맞춰야 할 제도를 경제적 측면에 더 집중해서 본다는 심각성이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 스스로 인지가 어렵거나, 보고할 수 없는 경우 발생될 수 있는 가족에 의한 학대를 예방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 가능한 장애의 경우까지도 스스로 결정할수 없도록 제한할 명분이 되지 못함은 해외 사례를 통해 증명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Consumer-Directed Service 제도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소비자임을 인식하고, Self-Directed Services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서비스 제공자를 선택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 고용, 훈련, 근무 시간 조정등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인지 가능한 장애인은 가족·친구·연인 등 신뢰 가능한 사람을 공식 활동보조인으로 정합니다. 인지 기능에 제한이 있는 경우 공공기관 혹은 부모나 대리인이 활동보조인 고용과 관리를 대신 합니다.

이를 위해 Medicaid 연방 및 주정부 공동 자금 운영을 통해 직접 고용 모델(Employer Authority)과 예산 자율 모델(Budget Authority)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 뉴저지에서도 PASP(Personal Assistance Service Program)을 운영합니다. 중증 장애인에게 현금 수당을 지급하고, 이를 통해 본인이 직접 활동보조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영국 역시 직접지불 제도로 자신이 케어 가능한 자금을 직접 관리하며 개인 보조인 제도로 고용하게 함으로써, 장애인 당사자와 주변인의 연결점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핀란드 역시 이런 보조 서비스에서 자기 결정권을 최대한 보장하며, 서비스 바우처 제도를 통해 보조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장애인들을 국가나 단체가 관리하려다, 오히려 가족과 장애인 당사자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장애인이 제3자에게 신체적·정서적 노출을 하기 원치 않아 가족과 동행하면, ‘동행과 활동 외에는’ 어떤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차별을 겪게 됩니다.

▲류한승 목사가 쇼다운 종목에서 우승 뒤 기념촬영하는 모습. ⓒ국립재활원

▲류한승 목사가 쇼다운 종목에서 우승 뒤 기념촬영하는 모습. ⓒ국립재활원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을 합니다.

①억지로 관계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직접 ‘비용 지출’도 해야 한다(자부담제도). 만약 매칭이 안되면 사용이 불가능하다.
→ 자연스럽게 중증장애인은 마음에 맞는 활동보조인 제도를 사용하기도 어려워지고, 외출이나 활동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②신뢰 가능한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 가족은 다른 활동 보조인이 할 수 없는 일까지 다 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가족이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긴다. → 그로 인해 다른 노동을 선택할 기회도 없어진다. → 가족 구성원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활동 축소로 가게 됩니다.

10. 여기에서 나아가, 다른 제도를 만들어 분리시켰습니다.

활동보조인과 업무보조인은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장애인을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업무 도움을 받고 싶을 때 활동보조인은 할 수 없습니다. 따로 업무보조인을 불러야 합니다. 이를 통해 경제가 활성화되고 일자리가 늘어났다고 보고합니다.

내 신체조건과 마음에 맞는 활동보조인을 구하기도 힘든데, 업무보조인을 구하기가 쉬울까요? 2024년 9월, 경기 의정부시에서 안마소를 홀로 운영하던 장성일 씨(44)가 있었습니다. 5년 정도 활동지원사를 통해 업무지원을 받았다며, 2억 원을 환수하겠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삶의 희망이 무너졌네. 장애가 있어도 가족을 위해 살았고 남에게 피해 안 주려 했는데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 하니, 너무 허무하다.”

분리시키는 행정이 현실을 담지 못합니다.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류한승 목사 등이 휠체어 스키를 타는 모습. ⓒ국립재활원

11. 사회는 장애인 당사자에 대해 보다 많이, 진심을 다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장애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분리가 아닌 연결입니다. 그리고 확장입니다. 장애인 당사자,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평범한 삶에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본적으로 친밀한 사람들, 가족 구성원들과의 분리가 먼저가 아닌, 연결을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2024년 Xiaoyan Liu가 쓴 논문에서는 “가족의 지지, 가족의 연결,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가족 기능이 활발하면 장애인의 사회적 회피와 고통이 감소된다”고 보고합니다. 사실 꼭 장애인 이야기가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행복과 삶의 질 관련 연구에서 가족과의 시간, 연결성, 유대감 등이 우울과 행복, 삶의 질에 연관돼 있음을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제도도, 당사자 중심으로 풀어갑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 정책의 경우, 장애인 당사자가 가까운 사람들과 같이 놀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다니며, 같이 예배드리기 쉽도록 장애인과 함께 동반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스위스 SBB Companion Travelcard는 장애인과 동반자가 함께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며, 이는 공연장, 스포츠, 경기장 등의 이동을 함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National Sports Center for the Disabled 역시 스키, 스노보드, 하이킹, 캠핑, 레프팅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도록 전문 강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헬스장은 Inclusive Fitness Initiative 인증을 받는 곳이 많습니다. 인증을 받은 곳은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도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노출 빈도가 많아지고 서로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Morgan’s Wonderland에는 세계 최초로 휠체어를 탄 채 탑승 가능한 놀이기구들이 있고, 일본 유니버셜 스튜디오나 미국 디즈니랜드도 각 어트랙션 별로 함께 사용 가능한 놀이기구가 있습니다. 미국 디즈니에서는 동반인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합니다. 장애인과 함께 온 동행인은 몇 사람이건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혜택을 받습니다. 벨기에는 장애인증이 있으면 동반자는 한 몸으로 인식해 무료 입장합니다. 일본은 물론 핀란드 린난마키 놀이공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류 목사가 스포츠 휠체어를 타고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 ⓒ류한승 목사

▲류 목사가 스포츠 휠체어를 타고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 ⓒ류한승 목사

12.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지요. 그들은 ‘당사자를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함께’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함께라 함은,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함께 오는 것이 자연스럽고 즐겁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애인들이 어디든 자주 나갑니다. 아니 장애인들은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나갈 수 있습니다. 함께 나간다고 미안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함께 있을수록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장애인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지는 문화와 시설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의 ‘시설’ 안에 묶어둡니다. 분리, 분리, 분리에 익숙한 우리는 사회에서도 장애인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에서도 반을 나눕니다. 교회도 장애인 반을 따로 만듭니다. 50% 혜택을 주고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준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그러니 장애인은 장애를 가진 기간이 길수록 차별 인식률이 저하되고, 차별 응답에서도 객관적 차별 인식에 대해(예: 장애인은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차별이 많다고 응답하지만, 주관적으로 차별받는 경험을 물을 때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응답을 하는 기현상이 나타납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장애인의 날 자체가 시설화된 것은 아닙니까? 이 날만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적어도 교회에서는 ‘평범한 주일, 장애인들과 어떻게 함께 예배드리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장애인은 선교 대상이 아니라, 선교하는 동역자입니다.
장애인은 내가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예배드리는 예배자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성령 충만해진 요한과 베드로가 만난 장애인의 이야기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성전 미문 밖에 나면서부터 지체장애를 갖고 있던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는 의료적 행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그를 일으켜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 예배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가슴 아프게, 미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라고 또 놀라서’ 말합니다. “왜 여기 있어요?”

모두 미문 밖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던, 미문 안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44년간 장애를 갖고 살면서, 비장애인들과 동등하게 살려 했던 제가 꿈꾸는 세상도 그러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주변 모든 비장애인 성도들, 친구들과 같이 서고 같이 달리고 같이 이야기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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