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음 대통령, 실수 거듭하던 베드로 같은 사람 뽑지 말고…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누가복음 24:24-26)”.
부활(復活)이란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남’을 뜻하며, 라틴어로 ‘resurrectio(레수렉시오)’입니다. 단순히 살아남을 넘어,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의 자비하심이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의 조상, 탄생, 성장 과정에 대해 사복음서 중 가장 완전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값없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몸소 죄인들의 슬픔과 곤경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이상을 실천하시고 성취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한 가정의 주치의처럼 연민의 정과 온화함으로, 인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조심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조상과 탄생, 초기 생애를 강조한 후 지상 사역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말씀 중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24절)”이란 한 사람은 베드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요한으로 추측이 됩니다(요한복음 20:2).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긍정적인 반문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의 전통적인 메시아사상에 사로잡혀 메시아의 영광만을 기대할 뿐, 고난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사건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구약 속에서 메시아의 영광과 승리만 바라보았고, 이러한 복된 길이 고난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곧 구약을 바르게 해석하시고, 그들 가운데 계시며 행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모시고 있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6절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매우 특이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예수님인줄 몰랐고(27-30절), 실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39절)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36절)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 나오는 “그날”은 1절의 “안식 후 첫날”과 같은 날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이 하루에 다 발생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욥바 쪽으로 12km 정도로 추정되며, 어떤 학자는 이곳을 현재 ‘쿨로니에’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엠마오(Emmaus)의 원래 뜻은 ‘hot spring(뜨거운 샘, 온천)’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함마‘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따뜻한 우물’이란 뜻이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헬라어 지명인 ‘엠마우스’를 히브리식으로 표기한 두 개의 다른 명칭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이 모든 된 일(14절)”은 예수의 죽으심과 빈 무덤 사건에 관한 일입니다. “문의할 때(15절)”란 ‘논의하다, 열렬히 토의하다’는 뜻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토론에 열중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곁에 다가가 그들과 동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주님께서 옆에 계셔서 늘 동행하고 계심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은데, 오늘 본문 속 엠마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고, 실체를 가지고 계셨음에도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르는 체 “무슨 일이냐”며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 강력한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엠마오 사건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는 그들이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대했던 모든 희망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비애를 맛보았습니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34)”. 누가복음 22장 32절 말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처럼, 사탄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의 보호하심 덕분에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약하게 굴복하지 않고 동료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굳건하게 행동할 것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집에서 잡히시고, 22장 56-60절 사이 베드로는 주님 말씀처럼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곧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후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릴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막심한 후회 속에 자신을 때리며 내가 왜 그랬던가? 하며 스승을 배신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참을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나무 형틀에서 운명하셔서 무덤으로 들어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곁으로 다가가 길동무를 해주십니다.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배신자를 지켜주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잊은 채,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에 가서 이전에 하던 생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 다시 주님 곁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2,000년 전 일이라 우리는 베드로처럼 하지 않을 거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날은 오히려 당시보다 더 안락하고 편리한 시대임에도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고, 자신의 입지와 사정에 따라 예수님을 끌어들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거짓의 날개를 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분들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성격은 급하고 감정에 솔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언하시고 그들에게 잡히시자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류했으며, 주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두려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다 죄책감에 때문에 오열한 것입니다.
지금 나라를 보면,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당 대표가 잘못하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곁에서 충고를 쉬지 않아야 하는데, 더욱 충성스럽게 잘 보여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못된 충성심 때문에 애꿎은 백성들과 충신들만 낭패를 봅니다.
나라와 백성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함께 고군분투해야 함에도,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허황된 생각과 착각과 망각 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어찌 이를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로 생각하다 저지른 실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 제물로 내어주신 것임을 모르다 보니, 제자들은 많은 오해와 실수를 범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쓰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날마다 부활 정신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회개하며 고백하는 순수한 부활 정신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완전히 분리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극심한 폭풍과 풍랑을 만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새로이 변화되는 부활 정신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며, 부활을 바라보며 누군가 낙심할 때 손 내밀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친구와 힘이 되어주는 부활 신앙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