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부활 후의 삶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29)”.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누가복음 24:34)”.
요한복음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첫 번째 무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의 말만 듣고 주님의 부활을 믿은 제자들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들에 이은 두 번째 무리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이 두 번째 무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는 직접 체험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기쁨의 탄성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의 토대가 되는 고백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제자들 중 베드로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는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이 포도원 품군 비유의 교훈은 당대나 지금이나 같은 맥락으로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9월 말경 포도를 수확했는데,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어서 서둘러 수확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수확철에 장마를 비롯한 태풍이 몰아쳐 농사를 망치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고용해야 했습니다. 이 비유 내용은 팔레스타인의 포도 수확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오래 일하고 많이 수확한 사람이 가장 많은 임금을 받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공로나 능력이 아닌, 은혜의 원칙이 지배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르셔서,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도 무한히 많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던 아들이 아니라, 밖에서 방탕하게 지내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의와 공로를 주장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보상은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앞선 두 비유보다도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깊고도 넓고도 높은 마음이 좀 더 사실적이며 인상 깊게 전개됩니다.
우리였다면, 자기 재산을 몽땅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저렇게까지 환영하며 기쁨의 잔치를 베풀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온갖 세상 죄를 지고 돌아온 아들을 크게 징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고의 대우를 해주며,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아 누리는 기쁨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동생의 짐까지 떠맡아 수고한 큰 아들은 정말 억울했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 큰 아들에게 더 깊은 감사와 후한 대접을 했겠지만,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놀라운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최고 걸작 비유입니다.
성실하고 착하게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와 달콤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해 이웃의 공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잠시 한눈 파는 사이 도용이나 절도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주제는 ‘부활 후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활 후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면서 많은 신앙인들의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과 예수님의 당부를 받아들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체험하고, 그 체험이 전수돼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나오는 의심 많은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로 시작해 ‘사도’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여기서 ‘제자(弟子)’란 지식이나 덕을 갖춘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 쉽게 말해 배우는 자와 따르는 자입니다. 반면 ‘사도(使徒)’란 어떤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다시 말해 보냄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타를 받은 도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철저한 회의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단 한 번 만나 모든 의혹을 떨쳐 버렸습니다. 그가 전제로 내세운 조건들은(25절)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조건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며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의심을 떨쳐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이 후기이고, 본래 20장에서 끝난 것이었다면, 최후의 고백을 한 사람은 도마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도마의 고백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요한복음 첫 마디인 1장 1절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요한이 복음서를 집필한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현재를 사는 신앙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고 체험한 사람들과 다름 없이 믿고 더 가까이 다가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믿는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직접 보고 믿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겠지요. 이런 성경 말씀도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도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큽니다. 예수님 부활 전, 무덤으로 들어가시기 전까지는 훌륭한 제자로서 장차 다가올 세상을 그리며 많은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하며 도망가거나,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하며, 자신의 잘못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뒤집어 씌우는 모함과 시기,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며 갖은 모욕과 흉계를 꾸미는 것은, 보지 못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 보건 말건 정직함과 공의롭고 공정하며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건만, 수없이 죄를 지으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버젓이 세상을 이끌겠다며 설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득을 보겠다고 설치며 따라다니는 인간들도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들 역시 양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는 냉혈 동물인지요. 당 대표의 많은 사법 리스크를 알면서도 충고는커녕 많은 백성들에게 실망감을 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지난 4월 21일, 천주교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병으로 입원하시고, 퇴원하셔서 부활절 성 베드로 성당에서 메시지를 전하신 후 다음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심판을 받는다는 부동의 사실을 전제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심판이 인간에게 내려집니다. 28절에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은 재림하셔서 심판주가 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지도자로, 한국의 남북 평화를 강력히 이끌고자 하셔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왜 대한민국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단체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지 아쉽습니다. 그래도 성직자인데,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비행기 사고로 죽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는데도 이에 대해 함구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복음화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차라리 폐지시키든지 천주교에서 내어쫓든지 해야 할텐데, 그냥 놔두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악을 비롯해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우리 신앙인들은 겁 없이 주님만 의지하고 믿으며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재림 시기가 다가옵니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종들이 장차 대한민국의 운명을 위해 기도하고 깨어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나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