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장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맥(잣대)에 의한 번역:
‘확립한 것을 이끌어 올리셔서 하나님 그는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사역을 하는 그들(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바꿔서 변경한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것을 열망하는 것들 안에 그녀(열망)가 지혜의 사역으로 길들여지지 못하여 더렵혀짐을 당하게 하기 위하여, 서로 서로 그들의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짐을 진 몸들을 업신여기게 하는 것을 적용하도록 허락하셨느니라’
‘정욕대로’, ‘내어 버려 두사’, ‘욕되게 하셨으니’는 번역상 오류다. 본 절의 한글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이 저들의 마음의 육신의 정욕대로 더럽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셔서 저희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고깃덩어리로 된 몸을 짐승처럼 더럽게 행동을 하고 서로 부끄럽고 욕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방치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바꿔서 변경한 자들을 포기해 버리셨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계획과는 상반되어 버린다.
먼저 ‘그러므로’라고 번역한 ‘알-켄()을 살펴보면 ‘그러므로’, ‘때문에’라고 번역을 하면 안 된다. 히브리어는 상형문자다. 뜻글자라는 말이다. 또 많은 내용을 담은 한 단어로 축약되어 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창세기 1장의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를 ‘힌네()’라는 단어로 축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축약된 단어의 의미를 모르니까 성경 전체에서 ‘보라’, ‘그녀들’, ‘이리로’라고 몇 곳에만 번역이 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일체 번역을 하지 않았다. 여기의 ‘알-켄()’은 창세기 1장에 매 시기마다 ‘그대로 되니라’가 나오는데, 여섯째 시기까지 여섯 번 나온 것을 합쳐서 축약된 단어로 말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큰 착각이다. 성경은 맥이 있다. 이 맥에 의해서 열리고 해석되어야 한다. 하늘들의 물들이 인간의 마음땅의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덮고 있는 무저갱의 물들을 덮고 흘러가는 맥이 있다. 이 맥을 보지 못하면 성경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 ‘알-켄()’에 의해 적용되도록 허락을 하신 것이지, 정욕대로 더러움에 방치해 버리시고 고깃덩어리가 서로 욕되게 살아가게 포기하셨다는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는 육신의 정욕대로 더럽게 행동하라는 말이 아니다. ‘뻬타아오트()인데 명사, 여성, 복수다. 넷째 시기, 다섯째 시기,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열망들, 갈망들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땅을 향하신 계획의 목표는 넷째 시기, 다섯째 시기, 여섯째 시기인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불태우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목표에 이르기를 열망하고 갈망을 하고는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적용해서 무지를 죽이는 지혜를 익히고 적용해 나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음땅에 익히고 적용해 나가기 위해서는 아픔인 고난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깨끗한 열망을 가지고 출발은 하였으나 비틀거리고 넘어지게 되니까 어두움인 무지에 오염되어 더럽혀지게 된다. 그래서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는 일평생을 통해 끊임없는 반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익히고 적용해 가는 것이 몸에 배어 길들여지고 습관이 붙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믿음 없이는 길들여 질 수 없다. 신앙생활은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생명으로 부활되는 훈련을 길들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적은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인 무지의 생각의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칭찬받는 믿음만이 비틀거리거나 넘어지지 않는 믿음이다. 더럽혀지지 않는 믿음만이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열망을 열망한 대로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알-켄()’, 즉 매 시기마다 그대로 확립이 되도록 이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는 잘못된 번역이다. 그들 서로서로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깨트리는 짐을 진 몸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이 몸이 신령한 몸이다. 어두움인 무지가 죽고 생명으로 부활한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시다.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몸의 생명의 가치를 인식을 하지 못하고 멸시하고 우습게 보고 서로 서로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으로 오류된 부분은,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바로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계가 올바르게 개념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없다는 말이다. 죽음, 부활, 생명, 피, 탄생,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개념으로 확립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기독교의 현주소다. 그러니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목표로 있는 어두움인 무지가 죽고 생명으로 부활하여 이루어지는 신령한 몸을 우습게보고 업신여길 수밖에 없다. 이 몸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본체가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것도 인식을 할 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의 잣대와 사람의 잣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을 못할 것이다. 잣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행위들로 더럽혀지고 신령한 몸을 업신여기도록 허락하고 계신가? 이것을 허락하셔야 하나님의 불태워 버리시는 진노가 임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속성들을 불태우시는 것으로 진노하신다. 이 진노 아래에서 어두움인 무지를 남겨 놓을 자는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서균석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교회(통합) 담임목사 은퇴
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문의: 010-3728-0245
홈페이지: http://www.koreahebrew.com